2025.06.20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리문화편지

암행어사, 사치스러운 쥘부채 못 만들게 주청 올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087]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흥양현(興陽縣, 현재 전남 고흥군)은 과거에 대나무의 산지로서 매년 부채 만드는 편죽(片竹)을 1천 5, 6백 자루나 혹은 2천여 자루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대밭이 점차 옛날 같지 않아서 여기저기 다른 고을에서 사다가 바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근래 각 읍의 대밭이 곳곳마다 벌거숭이가 된 것이 본 읍과 다름이 없습니다.(중간 줄임) 이후로는 부채 만드는 제도도 오로지 튼튼하고 소박하게 만들도록 하고 부채살 수는 단오선의 살수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겉에 뿔을 대어 기교를 부린 것이니, 합죽선, 옻칠한 종이부채 따위들을 일체 엄금하소서.”

위는 《정조실록》 18년(1794) 11월 27일 치 기록으로 양남의 암행어사 서유문(徐有聞)이 정조에게 아뢴 내용입니다. 부채 만드는 것 때문에 여러 고을의 대밭이 쑥대밭이 되었다니 엄살이 좀 심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성종실록》 23년(1492) 3월 23일 치에도 “단오 때에 진상하는 부채는 비단에 주칠(朱漆)을 하였는데, 사치스럽기만 하고 실용 가치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양대비전(兩大妃殿)에 바치는 것 외에는 다시 그렇게 하지 말라.”라고 성종이 엄명을 내렸다는 것을 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 쥘부채(합죽선), 43cm, 20세기, 온양민속박물관

당시 사대부들에게 합죽선(合竹扇) 곧 쥘부채는 단순히 더위를 견디려는 도구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쥘부채의 사치는 도를 넘어 뿔로 꾸미고, 은ㆍ백통ㆍ놋쇠 같은 재료로 고리를 붙이며, 옻칠을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에어컨으로 더위를 피하는 지금이야 부채를 찾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지만 근세까지만 해도 부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면서도 사치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