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 가운데 셋째로 큰 윤리인데, 무상하게도 나의 아내는 그동안 나와 함께 어려운 사람 속에서도 동고동락해왔으나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에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가운데 줄임) 그러므로 그 사정을 생각해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서 우리의 혼인관계를 파하고 위 댁(宅)으로 보낸다. 만일 뒷날 말썽이 일어나거든 이 수기를 가지고 증빙 할 일이다.”
![]() |
||
▲ 엽전 35냥에 이혼을 허락하는 문헌(전주대학교 박물관) |
위 내용은 조선후기에 한 평민의 것으로 보이는 이혼 사실 기록 문서입니다. 평민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수기의 끝에 한글로 이름을 쓰고 수결이 아닌 손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지요. 일제강점기 때부터는 모두가 도장을 찍었지만 그 이전엔 양반은 사인(sign)의 하나인 수결(手決)을, 평민이나 노비는 손이나 손마디를 그린 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손을 그리는 것은 수장(手掌), 손마디를 그리는 것은 수촌(手寸)이라 했지요.
이 수기를 보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35냥을 받고 아내가 위 댁 곧 중이나 양반댁으로 보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아내를 팔았는지, 아니면 아내를 빼앗기고 이혼 위자료 35냥으로 입막음을 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수기로 우리는 조선 후기 서러운 평민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양반 출신의 여성과는 달리 평민이나 노비들은 이혼이나 재혼을 쉽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