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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거리

윤동주의 애국혼 체취를 물씬 느끼다

연변서 열린 “제18회 한국전통음악교류회”를 취재기 2

[우리문화신문=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18회 한국전통음악교류회일정 이틀째다. 오전에 우선 연변대학교에 가서 하루 뒤 올릴 공연 리허설을 진행했다. 간단하게 하는 리허설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서한범 단장은 이번 공연의 의의와 가져야할 마음자세에 대해 나긋나긋 얘기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용정으로 이동한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이다. 먼저 한적한 도시 용정에 들어서자 그 유명한 평양식 냉면을 먹으러 냉면집에 들어갔다. 특식이라는 냉면과 중국식 탕수육 그리고 토마토는 우리 입맛을 돋운다. 몇 사람을 빼고는 그 큰 냉면그릇을 싹싹 비운다. 중국에 와서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냉면을 먹게 될 줄이야.

 

식사 뒤 곧바로 윤동주가 공부했던 대성중학교로 이동했다. 아담한 대성중학교에 들어서자 보이는 윤동주 시비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리곤 이층에 올라가 해설사로부터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191712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은진중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했던 윤동주는 19359월 편입한 숭실중학교에서 시 10, 동시 5편 등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낼 정도로 활발한 창작세계를 열어나갔다.

 

이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는 가장 좋아하던 정지용이 다닌 학교, 단짝 친구 송몽규가 다니는 동지사대학에 전입학했다.


 


그러던 1943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사촌이자 단짝이었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윤동주는 19452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의 죽음에 이어 20일 뒤 죽은 송몽규 또한 정체 모를 주사를 맞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그리고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제에게 죽음을 당한 윤동주에게 정부는 19908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 순수했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문학에 심취했던 윤동주를 우리는 대성중학교에서 만났다. 윤동주처럼 시를 쓰지는 못하지만 국악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단원들은 가슴 속에 그의 애국혼을 담고 나왔다.

 

이후 단원들은 뜻하지 않게 연길에서의 무한리필 삼겹살 잔치를 즐기고 조선족예술단 공연을 보러갔다. 시작하자마자 현란한 솜씨와 빠른 속도로 무용과 노래를 하고 태평소 등 악기 연주를 이어간다. 연주자가 객석 한 복판에서 나타나기도 하면서 관객과 소통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공연이 끝나고 초당대 조혜영 교수는 오랫동안 우리와 소통이 안 되던 연변의 음악이 저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슴 아프다. 느리면서 장중한 음악으로 그 깊이를 더하는 우리의 음악에 견주어 저들은 그저 빠른 소리, 화려한 몸짓으로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내일 볼 연변대학교의 공연은 뭔가 다를 것이란 기대를 한다. 그들은 조선족예술단과는 달리 수준있는 음악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연변에서 이틀째 단원들은 보람차고 의미있는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더욱 가슴 벅찬 하루일 것이다. 연변대학교의 공연을 보고, 단원들의 기량도 뽐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더불어 서한범 단장의 창작국악극의 전개로 선악의 새 활로를 찾자”, 연변대학 예술학원 리홍관의 서도잡가 공명가에 대하여등의 학술 발표도 함께 할 예정이기 때문에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



























































허설이 끝나고 용정으로 이동한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이다. 먼저 한적한 도시 용정에 들어서자 그 유명한 평양식 냉면을 먹으러 냉면집에 들어갔다. 특식이라는 냉면과 중국식 탕수육 그리고 토마토는 우리 입맛을 돋운다. 몇 사람을 빼고는 그 큰 냉면그릇을 싹싹 비운다. 중국에 와서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냉면을 먹게 될 줄이야.

 

식사 뒤 곧바로 윤동주가 공부했던 대성중학교로 이동했다. 아담한 대성중학교에 들어서자 보이는 윤동주 시비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리곤 이층에 올라가 해설사로부터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191712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은진중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했던 윤동주는 19359월 편입한 숭실중학교에서 시 10, 동시 5편 등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낼 정도로 활발한 창작세계를 열어나갔다.

 

이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는 가장 좋아하던 정지용이 다닌 학교, 단짝 친구 송몽규가 다니는 동지사대학에 전입학했다.

 

그러던 1943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사촌이자 단짝이었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윤동주는 19452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의 죽음에 이어 20일 뒤 죽은 송몽규 또한 정체 모를 주사를 맞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그리고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제에게 죽음을 당한 윤동주에게 정부는 19908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 순수했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문학에 심취했던 윤동주를 우리는 대성중학교에서 만났다. 윤동주처럼 시를 쓰지는 못하지만 국악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단원들은 가슴 속에 그의 애국혼을 담고 나왔다.

 

이후 단원들은 뜻하지 않게 연길에서의 무한리필 삼겹살 잔치를 즐기고 조선족예술단 공연을 보러갔다. 시작하자마자 현란한 솜씨와 빠른 속도로 무용과 노래를 하고 태평소 등 악기 연주를 이어간다. 연주자가 객석 한 복판에서 나타나기도 하면서 관객과 소통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공연이 끝나고 초당대 조혜영 교수는 오랫동안 우리와 소통이 안 되던 연변의 음악이 저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슴 아프다. 느리면서 장중한 음악으로 그 깊이를 더하는 우리의 음악에 견주어 저들은 그저 빠른 소리, 화려한 몸짓으로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내일 볼 연변대학교의 공연은 뭔가 다를 것이란 기대를 한다. 그들은 조선족예술단과는 달리 수준있는 음악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연변에서 이틀째 단원들은 보람차고 의미있는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더욱 가슴 벅찬 하루일 것이다. 연변대학교의 공연을 보고, 단원들의 기량도 뽐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더불어 서한범 단장의 창작국악극의 전개로 선악의 새 활로를 찾자”, 연변대학 예술학원 리홍관의 서도잡가 공명가에 대하여등의 학술 발표도 함께 할 예정이기 때문에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