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가 22일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본 수원 창성사터의 역사적 가치’를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 한신대박물관 이형원 학예연구사와 강정식 연구원은 “창성사의 존속 시기는 크게 4기로 구분되는데, 4기는 정조 재위 시기(1776~1800)인 조선 후기”라며 “18세기 후반은 수원화성과 연계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를 주관한 한신대박물관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터를 발굴 조사했다. 연구원들은 고려말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의 탑비(塔碑)가 있었던 터를 확인했고 중심 건물과 부속 건물터, 고급 청자와 백자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
또 창성사지가 있는 광교산 일대에 대한 광역 지표 조사를 해 미학사지, 상광교동 사지 등 건물터와 유물 산포지 등 19개소의 불교 유적을 새롭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수원 창성사지 발굴조사 성과와 의의’를 공동발표한 이형원 학예연구사와 강정식 연구원은 “문헌, 고지도, 비문 따위를 분석해보면 창성사는 원주 법천사, 용인 서봉사, 여주 신륵사 등과 함께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전국 88개 자복사(資福寺)로 뽑혔을 정도로 규모가 컸고, 위상도 높았다.”며 “창성사터를 비롯해 광교산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불교 유적을 제대로 조사하고 연구할 때 수원의 불교 역사·문화가 선명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발굴 유물 조사를 통해 창성사의 존속 시기를 ▲신라 말 고려 초기(9~10세기) ▲고려 시대(10~14세기) ▲고려 말 조선 초기(14~17세기) ▲조선 후기(18세기 후반)로 구분했다.
‘수원 창성사지 출토 자기의 종류와 의미’를 발표한 전승창 아모레퍼시픽미술관장은 “창성사터에서 현재까지 출토된 파편의 숫자는 청자 34점, 분청사기 44점, 백자 595점으로 조선 시대에 사용됐던 자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며 “출토된 파편은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대접과 접시가 주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문헌과 고고 자료를 통해 본 창성사’를 발표한 정해득 한신대 교수는 “조선말까지 폐사와 중창이 반복된 창성사는 고려 시대 양광도 지역의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면서 “정각승통 영소의 첫 주지사찰, 진각국사 천희의 입적 사찰이라는 사실로 미뤄볼 때 대가람(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의 면모를 갖췄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