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대구박물관(관장 권상열)은 소장품 연구성과를 담은 《대구 월성동유적 흑요석 원산지 및 쓴자국 분석》을 펴냈다. 이 책에는 ‘월성동 777-2번지 유적(이하 월성동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과 석기를 분석한 논문 2편, 주요 석기 사진을 수록하였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와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되는 흑요석(또는 흑요암, obsidian)은 화산지대에서 주로 생성되는 검은 돌이다. 이 암석은 각기 고유한 산지가 있다. 우리나라 구석기유적 가운데 흑요석이 출토된 곳은 50여 곳이 넘지만, 흑요석 산지가 밝혀진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대구박물관이 소장 중인 월성동출토 흑요석도 그동안 산지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대구박물관 연구진(김종찬 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ㆍ장용준 대구박물관 학예실장)은 월성동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 357점 중 100점을 LA-ICP-MS로 분석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월성동 흑요석은 백두산 흑요석임이 밝혀졌다.
* LA-ICP-MS: Laser Ablation - Inductively Coupled Plasma - Mass Spectrometry: 레이저절삭 유도결합 플라즈마 질량분석기
이번에 분석된 100점 중 97점은 모두 백두산 계열 가운데 제1형(PNK1)으로 판명되었다. 분석된 100점은 단일 유적으로는 가장 많은 흑요석을 분석하고, 정확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분석신뢰도를 높였다.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백두산에서 대구 월성동까지의 거리는 약 700~800km이다. 흑요석은 구석기인들의 손을 거치면서 700km가 넘게 이동했던 것이다.
또한, 백두산에서 구해졌던 이 흑요석은 새기개(뼈나 나무를 가공할 때 쓰는 석기)나 좀돌날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했다. 김경진(프랑스 뻬르삐낭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는 단단한 동물재료를 다듬고, 찌르개(槍)의 부속품으로 활용되어 수렵 등의 생활에 사용되었다.
그동안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지역의 흑요석이 백두산에서 온 것임이 밝혀진 적은 있다. 하지만 영남지역 구석기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이 백두산 원산지로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흑요석은 월성동 구석기인들이 백두산에서 직접 채취했거나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교환과 같은 방식으로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월성동유적의 흑요석 원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짐으로써 한반도 내 흑요석 네트워크를 통한 후기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이동 범위와 경로를 파악하는 실마리는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한반도 내 살았던 후기구석기인들의 삶의 방식을 복원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 대구 월성동 777-2번지 유적(대구에서 조사된 최초의 구석기유적)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 777-2번지 일원이다. 조사 결과, 후기구석기시대 문화층과 청동기시대 주기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구석기유적은 Ⅰ구역으로, 2006년 4월부터 11월까지 조사했다. 대구에서 정식 발굴 조사된 최초의 구석기유적이다. 약 300㎡ 정도의 구석기 문화층에서 13,184점이 출토되었다. 영남지역 후기구석기문화(40,000~10,000년 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 흑요석
그림 3. 대구 월성동유적의 위치와 구석기시대 흑요석 이동지도
실리카가 풍부한 마그마가 분출하는 동안 높은 점성과 급격한 냉각에 의해서 생성된 유리질 암석이다. 색깔은 대부분 검은색이나 회색, 갈색, 붉은색의 것도 있다. 단단하면서도 유리질 성분이 있어 예리한 날을 가진 도구를 만드는 데 적합하다.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때 돌도구를 만들 때 많이 사용한 돌이다. 특히 좀돌날, 화살촉, 긁개, 새기개, 밀개 등의 제작에 많이 사용했다. 백두산을 제외하곤 한라산, 울릉도 등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에는 흑요석 원산지가 발견된 바 없다. 한반도 내 구석기시대에 출토된 흑요석은 백두산 흑요석이 우세하다. 신석기시대에는 일본 규슈(九州)지역의 것을 많이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