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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헝가리 현상과 세종의 변역

[‘세종의 길’ 함께 걷기 5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 곧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살피고 있는데 10월 훈민정음 창제의 달을 맞아 여러 창신을 이룬 바 있는 세종을 다시 한번 그려본다. 세종은 세계 역사상 백성의 인권을 생각한 민연(憫憐)과 편민(便民) 정신을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 선언한 바 있다. 그밖에도 여러 부문에서 여러 과학자와 함께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세계 역사상 특정 시대에 인재가 많이 배출된 나라가 있다.

 

헝가리 현상(The Hungarian Phenomenon)

 

먼저 외국의 예가 있다. 헝가리는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노벨상 7명과 울프상(이스라엘의 울프상은 독일계 유대인 발명가 리카르도 울프가 세운 재단이 주는 상으로 노벨상 받기 전- pre 노벨상-상으로 이름나 있다.) 2명이 상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인구도 많지 않은 유럽 작은 국가에서 말이다. 결론은 이런 ‘헝가리 현상' 만들려면 잠든 호기심을 깨운 데 있다고 말한다.

 

현대 창의성 연구의 선구자이자 '몰입(Flow)'의 저자 칙센트미하이(83) 헝가리계 미국 클레어몬트대학원 특훈교수는 말년을 모국 헝가리에서 보내고 있는데 그는 지난 2017년 헝가리 교육부의 '창의성 교육 특별 고문'으로 위촉돼 교육 개혁을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우리나라 ㅈ일보와의 누리편지 대담에서 그는 과학ㆍ수학 천재 대거 배출한 동력으로 1880년~ 1920년대 출생자들에게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교육을 중시하며, 수학 문제 풀면서 사고력 키워준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는 소련식 획일적 교육이 진행돼 창의성이 금기시되고 주입식 교육이 진행되며 평균 이하의 교육 후진국 전락했다고 평했다. 더불어 “한국 교육은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라고 비판하며 미래 사회에 대비할 수 있게 도전을 즐기는 방법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1880년~1920년대 헝가리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들이 줄줄이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 헤베시(1885생, 노벨화학상 1943), 센트죄르지(1893, 노벨생리의학상 1937), 핵분열 연쇄 반응을 발견해 원자탄 개발의 초석을 놓은 실라르드(1898), '수소폭탄의 아버지' 텔러(1908), 폰 베케시(1898, 노벨생리의학상 1961), 홀로그래피를 발견한 물리학자 가보르(1900), 노벨물리학상 1971) 등이 대표적이다. 헤베시(1885, 노벨화학상 1943), 위그너(1902, 노벨물리학상 1963), 하사니(1920, 노벨경제학상1 994) 등 이렇게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갑자기 인재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헝가리 현상(The Hungarian Phenomenon)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당시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교육을 중시하여 수학 문제를 풀면서 사고력을 키우는 교육이 이루어져 이에 과학ㆍ수학 천재가 대거 배출되었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당시 대표적인 것이 헝가리 고교생들 사이 수학 붐을 일으킨 '에트뵈스' 수학 경시대회다. 수학학회가 해마다 시행한 이 대회는 수학 문제를 통해 지식의 깊이와 창의성을 테스트했다.

 

다른 요인은 《쾨말》이라는 수학 월간지다. 당시 학생들은 《쾨말》 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잡지가 나오면 며칠씩 걸려 문제를 풀었다. 헝가리 현상을 연구한 황농문 서울대 교수는 “고도의 몰입을 요구하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학생들은 깊고 날카롭게 생각하는 사고력을 발달시켰다."라고 분석했다. 폰 카르만, 하르, 리스 등 헝가리가 배출한 수학ㆍ과학자들은 고교 시절 바로 이 ‘에트뵈스’ 대회 수상자들이다.

 

칙센트미하이는 "2차 세계대전과 50년의 소련 지배로 헝가리 교육은 획일화됐고 학생들은 학습이 '지루한 일'이란 인식을 하게 됐다."라며 공산주의 체제에서 창의성을 금기시했고 교육도 주입식 위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 학생의 특색ㆍ장점ㆍ관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학습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며 그는 “교육이 단일 체계여야 한다는 관념이 창의성의 가장 큰 적(敵)"이라며 “가지 않은 길을 가려 하는 학생을 막아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칙센트미하이는 한국의 교육에 대해선 “지식을 전수하는 데는 강하지만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못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는 매우 크고 잦은 변화가 예상된다."라면서 “학생들을 미래 사회에 대비할 수 있게 불확실성과 변화를 포용하고 도전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7.1)

 

 

세종의 변역

 

세종 시대에 많은 인재가 있어 세종과 함께 많은 업적을 쌓았다. 인재가 많기도 했으나 인재를 인정하고 길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세에는 일반적으로 법(혹은 중세의 정치)은 규칙을 제시하고 백성은 이를 수용하는 질서를 밟는다. 그렇다면 세종의 말ㆍ일ㆍ글로 실현되는 생생 정치철학의 자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한 시대가 긍정적이고 풍요롭다는 것은 백성과 사대부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곧 사맛을 통해 함께 누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변역 : 무릇 사공(事功, 일을 한 공로를 중히 여김)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此變易風俗之大者)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후경(先甲後庚, 일의 앞뒤 차례를 잘 살핌)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세종실록》26/2/20)

 

변역 정신의 상징인 훈민정음 창제는 ㈎ 바삐 서두를 일이 아닌 것으로 ㈏ 풍속을 바꾸는 일이고 ㈐ 모두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 세 번을 더 생각하고 ㈒ 외국 주류문화에 어긋나지 않은가 생각하여 ㈓ 더 신중히 여겨 후세에 맡길 일이라고 주장한다. 세종은 이러한 반대와 난관을 극복하며 훈민정음과 여러 제도적

 

ㆍ과학적인 변역(變易)을 이루어 냈다. 이를 세종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 때는 대략 재위 초에는 부왕 태종 때부터 해오던 제도의 개혁인 ‘이위항식’(以爲恒式)이라 하여 《조선실록》 전체 394건 가운데 세종 때 225건으로 가장 많다. 이후 집현전과 상정소 등의 인재를 통해 많은 개혁[변역]을 이루어 간다. 그 가운데 중요 인물을 살펴보자.

 

▪ 정무처리의 귀재들

황희 : 그는 세종 8년에 우의정에 제수된 이래 24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고 18년 동안 영의정 다리를 지켰으니 세종 업적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맹사성 : 소 타고 피리 부는 재상인 그는 음악계의 든든한 조력자다.

유관 : 청백리의 깐깐한 관리로 이름났다.

 

▪ 학문적 후원자들

집현전 : 1420년 세종 2년부터 1456년 세조 2년까지 지속하였다. 제2기 세종 11년부터 18년까지는 관원이 32명이나 되었다.

변계량 : 특출한 문재(文才)다.

김종서 : 국방을 지킨 공이 크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펴내 우리역사 바로세우기에 공헌했다.

 

▪ 훈민정음 조력자

정인지 : 학문 진흥에 주춧돌인 셈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썼다.

 

▪ 과학자

정초 : 물시계 제작을 이끌어 냈다.

이순지 : 역산의 대가이며 간의대를 이끌기도 했다.

장영실 : 해시계, 자동물시계(자격루), 마치 등 새 발명품을 만들었다.

 

 

그밖에도 이름이 나지 않은 의학 총서인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농사 방법을 개량한 《농사직설》 등을 조사하고 집필한 연구ㆍ편찬자들이 있다. (참고: 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 2002》)

 

▪ 세종 이도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 인물에 세종이 자리 잡고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으로 으뜸 창제가요, 전체 세종현상을 일으킨 인물로 마지막 지휘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조심스레 하나의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국방, 언어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조선 초 1318년부터 30여 년간의 세종시대의 사회 변화시대를 ‘세종의 변역현상’[變易風俗 《세종실록》26/2/20)(King Sejong Dialectic Phenomenon) 혹은 개략하여 ‘세종현상(King Sejong Phenomen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세종 시대에 사람을 중히 여긴 생민 사상과 더불어 사물의 변역이 이루어진 시대여서 세종식 용어로 ‘세종의 생민과 변역의 시대’로 부를 수도 있다고 제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