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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과 왕수복의 사랑 이야기

평창강 따라 걷기 제5구간 – 계속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용항리 경로당이 오른쪽에 나타나자 용항교가 왼쪽으로 평창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 입구에는 효석문학100리길 제5구간 표시판과 안내도가 있다. 여기서 남쪽에 보이는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후평리를 지나 노산을 거쳐서 평창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소년 이효석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지금 내가 걷는 걸을 걸었고, 내가 보는 산을 보았고, 내가 듣는 강물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감회가 인다. 나는 서울에서 친구들이 봉평으로 찾아오면 꼭 이효석 문학관으로 안내한다. 문학관에는 2명의 문화해설사가 근무하는데 단체 관광객에게는 해설해준다.

 

이효석(1907~1942)은 문학관 근처인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진부면장을 했다. 그는 1914년에 평창읍에 있는 평창공립보통학교(지금의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봉평에서 평창읍은 거의 100리 길이므로 이효석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평창읍에서 하숙을 했다. 이효석은 1920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였다.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를 1925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1930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31년에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이경원과 혼인하였다. 혼인 뒤 조선총독부 도서과 검열계에 취직하였으나 일제에 협력한다는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보름 만에 사직하였다. 1932년에 그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이주하여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하였다. 1933년에 그는 김기림, 유치진, 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1936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지금의 숭실대) 교수로 취임하였다.

 

교수가 된 뒤 자연과의 교감을 시적인 문체로 유려하게 묘사하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한국단편소설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메밀꽃 필 무렵>은 1936년에 발표하였다. 1940년에 병으로 아내를 잃고 시름을 잊고자 만주 일본 등을 여행하였다. 1942년 평양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살에 요절하였다. 그의 유골은 평창군 진부면 논골에 안장했다.

 

이상이 문화해설사가 설명하는 이효석의 생애다. 그런데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문화해설사가 설명하지 않는, 이효석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비화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2018년 동계올림픽 때에 평창에 왔던 북한의 예술단장 현송월로부터 시작된다. 현송월은 북한의 삼지연 관현악단을 이끌고 올림픽 행사에 참여하였는데,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를 받아 우리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는 남북화해의 상징이었으며 그 뒤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한반도에서 핵전쟁 위험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현송월의 음악 스승으로서 왕수복이라는 인물이 이효석과 관련이 있다. 왕수복(王壽福, 1917~2003)은 일제강점기 유명한 가수였는데 광복 이후에는 북한에서 성악가로 활동하였다. 북한의 창법은 비음을 강하게 섞은 듯한 가성으로 우리 기준에서 보면 매우 어색하게 들린다. 이러한 창법을 북한에서는 ‘주체적 창법’이라고 부르며 특유의 맑고 높은 발성법을 ‘꾀꼬리 발성’이라고 한다. 꾀꼬리 발성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가수 왕수복이다.

 

왕수복은 원래 평양의 기생학교인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 그녀는 서도소리를 공부하다가 17살인 1933년에 기생 가수로 데뷔한다. 그녀가 부른 노래 ‘인생의 봄’이 실린 음반은 무려 120만 장이 팔리면서 요즘 말로 대박을 터뜨린다. 한창 인기를 누리다가 왕수복은 193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악을 배운다. 국악인이 유행가요를 부르다가 성악을 배운 것은 매우 특이한데, 이것이 훗날 북한 가요 창법의 모태가 되었다. 왕수복은 남북이 분단된 이후 평양교향악단의 가수로, 그리고 평양음악대학 민족성악 교수로 활동하였다. 왕수복이 양성한 제자 중의 한 명이 현송월이다.

 

왕수복은 24살인 1940년에 도쿄에서 34살의 이효석을 만난다. 당시에 일제는 우리말 사용금지 정책을 시작했다. 대중가요에서도 우리말 노래 가사를 쓰지 못 하게 하자, 왕수복은 가수에서 은퇴하기로 했고, 실의에 차 있었다. 이효석은 그해에 아내와 사별하고 젖먹이마저 잃은 뒤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이효석의 소설에 깊이 매료되어 있던 왕수복은 이국에서 우연히 만난 이효석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싶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이효석에게 왕수복은 구원의 여인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기생 출신인 왕수복은 최고의 지성인인 이효석 앞에서 불안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걱정이에요. 당신과 대화할 때 나의 지식이 짧아서 혹여 답답해할까 봐. 그리고 당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천하고 무식한 기생 애인으로 여겨져 당신이 나를 잠시라도 부끄럽게 여길까 봐서요.”

 

그러자 이효석은 그녀에게 가만히 휘트먼의 시를 들려주었다.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파도가 그대를 위해 춤추기를 거절하지 않는 동안

나뭇잎이 그대를 위해 속삭이기를 거절하지 않는 동안

내 노래도 그대를 위해 춤추고 속삭이기를 거절하지 않겠노라“

 

왕수복은 이효석을 따라 평양으로 돌아왔다. 숭실전문학교는 1938년에 폐교되었고, 당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직 아내의 상중(喪中)인지라 이효석은 왕수복과의 관계를 감추려고 했지만,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이효석의 제자 7명이 왕수복이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학생들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부탁입니다. 우리 교수님을 사랑하지 마세요.”

“왜요, 사랑하면 안 되나요?”

“선생님이 사모님을 잃은 뒤에 몸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폐가 좋지 않으시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참 고마운 학생들이네요. 교수님의 건강까지 근심하시니... 하지만 교수님은 여자가 사랑해야 더 건강해지세요. 마음이 약해지고 정신이 허기지고 삶이 힘겨울수록 사랑이 필요한 거 아닐까요? 학생들 무슨 차를 드릴까요, 커피 어때요?”

 

학생들은 차만 마시고 돌아갔다. 그러나 학생들의 충고가 맞았다. 1942년 그는 뇌막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20여 일 만에 36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의 임종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흐느꼈다.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가 남편을 만나 소설처럼 결혼 생활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꿈처럼 당신을 만나고 나는 그 꿈속에 들어가 2년을 살았습니다. 내가 태어나 오로지 존경하고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교양과 인격을 생각한다면, 나는 감히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기도 벅찬 존재였지요. 짧았지만 나를 깊이 아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좋아하였을까요? 돌아간 아내에게서 느꼈던 모습과 향기를 나에게서 느낀 것 같다고 당신은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그러신 것일 겁니다. 그래야 내게 쉽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나를 정말 사랑하였나요? 아내가 아닌 여인 왕수복으로 나를 예뻐했나요?”

 

 

이효석이 죽은 뒤에 26살인 왕수복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경제학 교수로서 유부남이었던 김광진(당시 40살)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광진은 여류 시인 노천명(1912~1957)과 연애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수복은 노천명을 밀어내고 김광진과의 혼인에 성공한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평양에 살던 김광진은 1949년에 김일성 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왕수복은 그 뒤 국립교향악단 가수가 되어 음악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5년에 왕수복은 김일성 앞에서 경기민요 ‘긴 아리랑’을 불렀는데, 김일성은 아낌없이 손뼉을 치고 재청을 했다고 한다. 1977년 그녀의 환갑날에 김일성은 환갑상을 차려 보냈다. 1997년 그녀의 팔순에는 김정일이 생일상을 보냈다고 하니 북한에서 왕수복은 크게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왕수복은 86살의 나이로 눈을 감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이효석과 왕수복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2016년 아시아경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아시아경제 기사 확인하기

 

나는 이 이야기를 2019년에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냈다. 연애 이야기는 젊은이에게나 늙은이에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누구에게도 흥미로운 법이다. 아뿔싸, 이효석 회상하다가 곁길로 너무 나갔나 보다. 다시 평창강으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