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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치르게 해달라는 김종서 청을 거절하다

북방지역 정비와 김종서-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큰 전투 가운데 하나로 파저강 전투가 있었다. 당시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노략질 형태로 쳐들어오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평소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바로 첩보를 이용한 전투가 활용되게 되었다.

 

세종 때 북방을 총괄한 장군 중에 김종서(1383~1453)가 있다. 부친은 무과 출신이나 그는 몸이 왜소하고 책을 좋아하고 시문을 가까이해 16살 되던 태종 5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6진 개척을 주도한 인물로, 그리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서 살해된 인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300여 년이 지난 영조 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현장에서의 김종서는 세종초 이전부터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벌도 받다가 세종 즉위년 11월 강원도 주민의 토지 감사에 대한 불만을 현지에 가서 조사하고 기민(饑民) 729명의 조세를 면제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당시 변계량이 조세를 감면해 주는 일은 “가난하여 조세를 면제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그리되면 국고가 비게 될 것입니다.” 했다. 하지만 세종은 이 문제에서만은 단호했다.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굶주려 죽는다는 말을 듣고 되레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차마 할 짓이 못 되오. ... 그 밖에 백성에게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 있겠소.” (《세종실록》 1/1/6)

 

세종은 백성의 편에 서고자 했다. 이후 세종 15년(1433)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가 된다. 그 무렵 북변 여진족의 한 족속인 우디거 족이 알목하(지금의 회령) 오도리 족을 습격하여 건주좌위도독 동맹가티무르(첨목아) 부자를 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만강 변을 우리 영토에 편입시키려 하였고 그 작업의 하나로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이징옥을 영북진 절제사로 삼았던 것이다.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무장 이징옥은 북변의 여진족을 정벌함으로써 상대를 눌러야 한다고 했고 김종서는 되도록 여진족들과 부딪치지 않고 북변을 개척하자는 주장이었다. 세종과 조정은 김종서의 의견을 좇아 6진 설치가 이루어졌다.

 

북변에서의 김종서의 위세는 대단했는데 그의 별명은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북방 지키기에서 세종은 김종서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는데 이런 관계로 김종서가 어머니상을 당하고도 상을 온전히 치를 수 없었다.

 

김종서의 상(喪)과 세종의 응대

 

김종서는 세종 18년 1월 21일(1436) 1년 상제를 마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상소하기를, “근일에 내지(內旨, 임금의 은밀한 명령)를 받들었는데, 신에게 1백 일 뒤에는 임소(任所)에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자식이 부모에게 3년의 상복을 입는 것은 고금을 통하고,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사람이라고 해서 미치지 않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자세히 살피셔서 신이 어머니의 슬하를 멀리 떠나 있음을 민망히 여겨, 신의 어머니가 감격하는 정을 비할 데가 없어서 매양 신에게 이르기를, ‘너는 빨리 네 직책에 돌아가라. 네가 능히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신에게 가기를 권했습니다. 아래로는 자모(慈母)께서 권면하는 간곡한 당부를 따라서, 다만 감히 사직(辭職)을 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감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므로, 어머니를 버려두고 돌아갔는데, 돌아가는 길 반도 못 가서 부고를 받게 되어, 영구히 자모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사와 하늘을 보고 부르짖었으나, 미칠 수가 없게 되니, 슬픔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지금 분묘(墳墓)에 여막(慮幕)을 지어 그 슬픔을 다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옵는데, 어찌 총명(寵命, 임금이 총애하여 내리는 명령)이 최질(衰絰,상중에 입는 삼베 옷) 중에 내릴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에 이미 그 효성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능히 그 상제(喪制)를 다하지 못했으니, ... 어찌 마땅히 기복(起復, 부모의 상중에 벼슬자리에 나아감)의 예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만약 삼년상(三年喪)의 기한을 짧게 줄이고 관직에 나아간다면, 다만 국가에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효도로써 다스리는 정치에 누(累)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상제(喪制)를 마치게 하여 풍속을 힘쓰게(격려해서 힘쓰게 함) 하신다면 지극한 소원이라 이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답하기를,

 

"경이 친상(親喪)에 마음을 다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훌륭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임금이 관계하는 신하에게 마지못하여 기복출사(起復出仕, 어머니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감)시킨 사람이 자못 많으며, 내가 생각건대, 함길도는 지경이 저 오랑캐 땅에 연해 있으므로, 수비와 방어의 긴요한 것은 본디 다른 도와 견줄 수가 없다. 경은 일찍이 측근의 관직에 있어 내 뜻을 자세히 알아서 중대한 임무를 맡을 만한 까닭으로, 단연히 경에게 북방의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지난번에 마침 어머니 상을 당하여 군문(軍門)이 오래 비었으므로, 내가 심히 염려했는데, 이미 장사를 지낸 뒤에는 옛날의 기복시키는 예에 따라서 그전 임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내 뜻으로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결코 다시 올리지 말고 억지로 최질(衰絰, 상중에 입는 삼베 옷)을 벗고 빨리 그 직책에 나아가라." 하였다. (《세종실록》 18/1/21)

 

세종은 야박할 정도로 김종서의 사직을 만류하고 김종서의 상을 치르고자 하는 마음을 거절한다. 이런 때 결단하는 세종이나 명을 받아야 할 김종서는 더는 개인이 아니다. 몸과 마음은 이미 나라가 우선으로, 국가를 위해 써야만 한다. 세종이 당대에 나라를 지키는 데는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주(프랑스어: noblesse oblige)의 봉사를 넘어선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평시에는 강무와 훈련

 

세종 시기에 전쟁이 없었음에 어떻게 국방력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평소 궁중의 일과로서 강무와 격구 등이 있었다. 큰 환란이 없는 한 강무(講武, 임금이 몸소 나와 실시하는 군사 훈련으로서의 수렵대회)는 정기적으로 행하였고 격구도 행했다. 강무 때의 사냥은 일종의 훈련을 겸하였다. 상왕이던 태종이 사냥을 일시 업(業)처럼 여긴 일이 있었으나 세종은 강무 때 사냥을 겸했는데 이는 차라리 놀이가 아닌 말타기 훈련에 속했다.

 

격구 : “ 내가 이것{격구]을 설치한 것은 유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군사들에게 무예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임금이 되기 전에 일찍이 이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 참으로 말타기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세종실록》7/11/20)

 

한번은 신하들이 격구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자,

 

“격구(擊毬) 하는 것을, 조정 신하들이 고려조의 폐해를 들어 폐지를 청한 자가 많았으나, 그러나 격구는 본시 무예(武藝)를 연습하기 위함이요,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 ... 내가 비록 친히 이를 치지는 않았으나, 그 치는 이치를 자세히 살펴보건대, 말을 잘 타는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하고, 그 달리는 재능에도 반드시 기마병보다 갑절이나 능해야만 칠 수 있어서, 무예를 연습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세종실록》 12/9/21)

 

강무의 《조선실록》기록을 보면 원문 전체 1,106건 가운데 세종 356건, 다음으로 태종 164건이다. 정작 왜란이나 호란의 기운이 있던 선조는 15건, 인조 6건, 효종 9건이다.

 

선정하는 임금은 여러 가지 일을 다 잘하고 선정하지 않는 임금은 이도 저도 하지 않는 형국이다. 외국의 큰 침략이 예상되지 않던 세종 시대 강무가 많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세종 참 정치의 한 모습을 보게 된다. 평시에도 전시를 대비해 격구와 강무를 통해 자신감 살리기 그리고 실제 전시에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 파저강 전투는 1차가 세종 15년(1433), 2차가 세종 18년에 있었다. 이후 4군을 형성하게 된다. (다음은 파저강 전투와 반간-反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