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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쓴 정인지(鄭麟趾)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태종 조에서 성종 조까지의 문신

 

정인지는 조선 태종 때부터 세종 그리고 문종과 단종 그리고 세조와 예종 다시 성종 때까지 활약한 유학자이자 공신이다. 정인지는 조선전기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태조 5년(1396)에 태어나 성종 9년(1478년)에 죽었다.

 

태종 11년(1411) 생원시에 합격했고, 태종 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 즉위년(1418)에 병조좌랑을 거쳐 세종 3년에는 상왕(上王 : 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라는 말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었다.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ㆍ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세종 6년에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다음 해(1427)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한다. 세종 13년(1431)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 《칠정산 내편》 : 중국 최고의 역법으로 알려진 수시력(授時曆)을 바탕으로 하는 재래의 동양역 법.

 

세종 24년(1442)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을 펴냈다.

 

* 《사륜요집絲綸要集》 : 조선 세종 24년에 진ㆍ한(秦漢)이래 명(明)나라까지의 제고(制誥, 임금이 내리는 발영 내용)와 조칙(詔勅,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명)을 편찬한 《사륜전집(絲綸全集)》 가운데 긴요한 내용만 뽑아 엮은 책.

 

세종 27년(1445) 1월 우참찬이 되고, 그 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지어 올렸다. 다음 해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하였고 《훈민정음》 서문을 지어 올렸다. 같은 해 예조판서를 거쳐 세종 29년(1447)에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다.

 

* 《치평요람》 : 역대 사적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사실을 모아 저술한 정치서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고쳐서 다시 펴냈다. 그리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 《고려사절요》 : 조선전기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 《고려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그밖에 정인지 등은 역대 사적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사실을 모아 엮은 《국조보감》의 편찬을 최초로 구상한 일이 있다.

 

* 《국조보감(國朝寶鑑)》 : 정치에 모범이 될 만한 일들을 모아 후세의 귀감(龜鑑)으로 삼기 위해 권제(權踶)와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해 태조ㆍ태종보감을 편찬하도록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정인지를 기억하는데 주목할 일은 세종을 보필해 훈민정음의 창제 뒤 지은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이다.

 

 

《훈민정음》 서문이 있는 《세종실록》 28년(1446) 9월의 기사를 보자.

 

(세종 28년 9월 29일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ㄱ은 아음(牙音)이니 군(君)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은데 ...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규(虯)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고,... ㅿ는 반치음(半齒音)이니 양(穰)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ㆍ은 탄(呑)자의 중성(中聲)과 같고, ㅡ는 즉(卽)자의 중성과 같고, ㅣ는 침(侵)자의 중성과 같고, ㅗ는 홍(洪)자의 중성과 같고, ㅏ는 담(覃)자의 중성과 같고, ...ㅜ는 군(君)자의 중성과 같고," 라고 하였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매 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날마다 쓸 때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복잡한 사정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세종실록》 28/9/29)

 

《훈민정음》 창제 정신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세종의 정음[소리 부호 차원에서] 정신이 펼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 이후

 

정인지는 단종 즉위년(1452)에 병조판서가 되어 병정(兵政)을 관장하면서 단종을 보필했다. 다음 해에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변의 성공과 함께 정변에 협찬한 공로와 수양대군의 신임 및 그의 인망으로 특별히 좌의정에 발탁되었다.

 

문종 2년(1452)부터 1454년에 걸쳐 편찬된 《세종실록》을 총감수(總監修)하였다. 세조 1년(1455) 세조의 즉위에 맞추어 영의정부사에 승진되었다.

 

세조 11년(1465)에 나이 70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궤장(几杖, 임금이 70살 이상의 대신에게 내려주던 궤(几)와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다음 해 관제 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봉해졌다.

 

예종 즉위년(1468)에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성종 2년(1471)에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성종 9년(1478)에 성덕이 있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 곧 임금의 스승으로 봉해 글을 숭상하는 풍습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에 힘입어 삼로에 뽑혔다.

 

성종 9년 1478년에 하동부원군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학과 전고(典故, 전거가 되는 고사)에 밝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이다. 비록 정치가로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세종∼문종대에 임금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필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역사ㆍ천문ㆍ역법ㆍ아악을 정리하였다. 더불어 한글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새로운 제도 정비에 이바지하였다.

 

단종∼성종 초에는 학덕을 갖춘 원로대신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잦은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에 따른 경직되고 혼란스러운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