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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김상헌과 최명길,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명분과 의리의 김상헌이냐 현실과 변통의 최명길이냐》, 김용희, 마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명분이냐 실리냐.

선택은 늘 쉽지 않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갈등한다. 명분을 따르자니 손해가 막심하고, 실리를 따르자니 면이 서질 않는다. 어떤 선택도 반드시 정답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기출문제집이라 했던가? 그럴 때 한 번쯤 펴들 만한 책이 있다. 김용희가 쓴 이 책 《명분과 의리의 김상헌이냐 현실과 변통의 최명길이냐》는 병자호란을 맞아 나라가 멸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명분을 따라 멸망을 각오하고 싸울 것인지, 실리를 쫓아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첨예한 논쟁을 벌이던 두 사람을 보여준다.

 

 

김상헌과 최명길, 두 사람은 각각 척화파와 주화파의 핵심 인물로 김상헌은 결사항전, 최명길은 항복을 주장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은 같았다. 다만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하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던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예의가 무너지면 나라가 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겼고, 명분을 좇되 현실에 따라 변통하는 유연성을 중시하던 최명길은 일단 나라를 보존하고 나서야 명분과 의리도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p.42-43)

“우리에겐 대항할 힘이 없소. 이대로 화친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된단 말이오. 명분과 의리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망하고서야 무슨 명분과 의리가 있단 말이오? 백성들을 생각해 보시오.”

최명길은 청나라 진영에 가면서 보았던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을 떠올렸다.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을 한다는 것은 삼강과 예의를 다 무너뜨리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부모의 나라였고, 왜란 당시에는 우리를 도와준 나라요. 어찌 우리가 오랑캐에게 황제라 부르고 신하가 될 수 있겠소?”

김상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나이 67세,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었지만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조정 대신들이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갈등하던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간 왕실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항복을 결심한다. 그러나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 초안을 찢어버린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항복 문서를 찢어버리는 뜻을 모르지 않았으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항복 문서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라.”

결국 인조는 홍서봉, 장유, 최명길 등에게 명했다. 각각 작성한 초안을 본 인조는 최명길이 작성한 초안을 선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상헌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돌아가신 대감의 아버지께선 선비들과 벗 사이에 유명한 선비셨는데, 대감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이나 짓다니 부끄럽지 않소.”

김상헌은 항복 문서를 가로채어 찢어버렸다. 예조판서가 외교문제를 다루는 벼슬이라 관례대로라면 김상헌이 글을 썼어야 했다.

“대감의 말이 옳습니다. 조정에는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대감 같은 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같이 이를 주워 붙이는 이도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최명길은 눈물을 흘리며 찢어진 문서를 주워 붙였다.

 

그 뒤로는 우리가 아는 대로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이마저도 최명길의 노력으로 두 손을 뒤로 묶어 결박한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지는 1순위 항복 의식 대신 2순위 항복 의식을 치른 것이었다.

 

이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었지만, 오히려 최명길은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들어야 했다. 사실 위기를 맞아 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준 건 최명길이었는데도 말이다. 청군이 들이닥칠 때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가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을 벌어준 이도 최명길이고, 항복 현장까지 끝까지 함께한 이도 최명길이었다.

 

반면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있던 그 순간, 김상헌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학가산 아래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상헌도 반대파의 비난을 받았고, 인조조차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고 말했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렸다”라며 두고두고 원망했다.

 

이에 대해 김상헌의 묘지명에는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도 따라 죽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간언해야 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바르게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다”라고 적혀있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그 치욕에 가담하지 않고 물러나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주장이다.

 

이런 논란에도 김상헌이 오랫동안 추앙을 받은 까닭은, 평소 그가 보인 대쪽 같이 곧은 성품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의 강직한 성품을 인정할 만큼 김상헌은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태도에서도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이이와 성혼의 학문을 공부한 서인 계열의 선비로, 백사 이항복에게 같이 학문을 배워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국난이 일어나 첨예하게 대립하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뜻을 같이하던 사이였다. 비록 서로의 신념은 달랐지만,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당하고 일관된 자세를 보였다.

 

둘은 1640년 겨울, 다시 청나라 심양 감옥에서 만났다. 최명길이 명나라와 은밀히 내통하며 물자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청나라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김상헌 또한 계속해서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 김상헌을 잡아 보내라는 청나라의 요구로 심양으로 끌려갔다.

 

둘은 여기서 결국 서로의 가치관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은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오랜 의심을 거두고 화해한 두 사람이 나눈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답은 함께 옥에 갇혀 있던 이경여를 통해 조선까지 전해져 뭇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만약 변통이 없다면 정치의 희망은 없다”라고 주장하던 최명길과, 매사에 철저히 명분을 고수하며 예가 아니면 따르지 않았던 김상헌. 이 둘의 대립과 논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분은 없으나 실리는 클 때, 혹은 명분은 있으나 실리는 작을 때 누구나 한 번쯤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정답이라 할 순 없지만, 결국 원칙을 따르되 일정 부분 변통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칙을 지키되 때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한다면, 지나친 원칙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어린이나 어른, 그 누가 읽어도 유익한 책이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벌어진 일생일대의 논쟁을 잘 몰랐던 이라면, 또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한 번쯤 고민해본 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