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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조선시대, 품삯 받고 대성통곡하는 ‘곡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87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선왕의 장례와 우리 태조의 장례에 저자의 잡색 여자들을 불러다 울며 따라가게 하고, 이를 통곡비(痛哭婢)라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 삼가 《두씨통전(杜氏通典)》ㆍ《당원릉장의(唐元陵葬儀)》에 보면, 공주와 내관 등이 둘러싸고 모두 울고 발을 구르고 하며 따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태행 상왕(太行上王)의 장례에는 공주는 후궁으로 대신하고, 사정이 있으면 관비(官婢)로 울며 따라가게 하소서.”

 

위는 《세종실록》 1년(1419) 12월 21일 기록입니다. 판소리 <흥보가>에 보면 흥보가 매품을 팔러 간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위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왕실 장례식에 우는 노비 곧 통곡비(痛哭婢, 또는 곡비)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없어진 풍습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상가에 울음소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상가의 수준을 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상주들은 장례식 때 곡하는 여인들은 고용하기도 했지요.

 

 

대신 울어주는 여성인 통곡비는 왕실의 장례식뿐만이 아니라 왕릉을 옮길 때와 사대부가의 장례식 때도 썼다고 합니다. 고구려 때에는 장례식 때 북을 치고 풍악을 울렸다고 하는데 성리학이 들어온 고려 후기부터 풍악이 울음으로 바뀌었다는데 어쨌든 체통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로서는 통곡비를 쓸 수밖에 없었기에 조선시대엔 통곡비라는 웃지 못할 직업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