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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열의 명리학 다가가기

현대 명리학, 합리적인 이론체계 갖춘 예측학

1편 입문 1장 총론 4절 발전사
[안승열의 명리학 다가가기 4]

[우리문화신문=안승열 명리학도]  행복은 예부터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이고 건강한 신체는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모든 간지술(태어난 해와 달과 날의 간지에 의하여 사람의 운명과 길흉을 점치는 기술)이 여기에 착안했고 명리학도 찾아낸(간명) 결과를 같은 목적에 활용하려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간과 십이지의 조화를 보며 인생의 길흉사를 판단하는 간지술은 주나라 시대에도 있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발전한 음양론이나 오행론을 사상적 기초로 하며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예언술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오성술, 구성법, 기학 등 여러 종류의 예언술이 있었으나, 이들은 명리학이 적중률(간명 예측의 정확도)을 개선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춤에 따라 10세기 이후 동양사회는 군사, 과학, 정치 등 모든 학문의 근거 이론을 명리학에서 구해왔다.

 

명리학은 구할 이상이 중국 것이라 우선 중국 것을 보고 한국 명리학의 대략도 살펴보겠다.

 

 

중국의 명리학

 

명리학은 당나라의 이허중(9세기 활동으로 추정)에 의해 학문적 체계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그간 전해져 내려온 고법(古法)의 명리학을 태월(잉태한 달)과 태어난 일 시에 년까지 다섯 인자를 감정하는 삼명학으로 다듬었으며 후세인들이 당사주라고 부르는 점술서를 남겼다. 당사주는 천상에 있다고 설정한 12개의 별과 태어난 년월일시를 관련지어 인생의 길흉을 예견하는 점술로, 특별히 초년, 중년, 말년, 평생의 4단계로 나누어 그때그때를 살아가는 길잡이가 되게 하는 등 주로 서민 생활을 널리 이롭게 했다.

 

이어서 음양오행과 상생상극설에 능통한 북송(AD960-1127)의 서거이(자는 자평-子平이며 강소성 출신으로 활동기는 10세기 말 11세기 초로 추정)가 그간의 이론들을 섭렵하고 삼명학에 나름의 연구를 더하여 “자평 명리= 자평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는 천간 지지의 의미와 그들의 상호작용, 점술의 원리 등을 재해석하여 인격의 운명, 곧 인생 전반에 걸친 육체적 정신적 길흉화복을 예견하는 등, 명리학을 수준 높은 운명 철학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삼명학의 다섯 기운 대신 년월일시로 주어지는 사주(四柱)와 일간 중심의 독창적인 간명체계를 세워 현대의 명리학에 이르기까지 기본이 되게 하였으니, 자평법은 간명의 범위나 내용, 이론의 다양성으로 보아 명리학의 정통이라 할 만하다.

 

이후 남송의 서승(徐升)이 자평법에 육신법을 더한 《연해(淵海)》를 저술하여 명리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는데, 이설(異說)에는 서거이와 서승이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어서 12세기 후반 주희가 불후의 이론인 ‘하도낙서’를 남겼다.

 

명리학은 명조에 와서 크게 발전한다. 명태조로 하여금 중원을 얻게 하여 성의백의 벼슬까지 받은 백온(伯溫) 유기(劉基 14세기 활동)의 명리서로 《적천수》(마침내 하늘의 뜻에 이르다는 뜻)가 있으며 이의 해설서인 임철조(18~19세기 활동)가 쓴 《적천수징의》는 원서에 버금가는 명저로 꼽힌다.

 

《적천수》에 이어 명의 숭정제 때( 1628~1644) 당금지가 자평법과 연해의 육신법 그리고 여타 명리학의 제반 원리를 편술, 종합한 《연해자평(淵海子平)》을 펴냈다. 이 책은 후대에 명리학 서적들의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민간 사회에도 폭넓게 유포되어 오늘날까지도 명리학의 진수를 담은 으뜸 고전으로 꼽힌다.

 

모두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과 2권은 음양오행의 기본 원리와 천간 지지와 육십갑자(六十甲子, 10 천간과 12 지지의 조합은 모두 120가지가 되겠으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60가지만 취하는데 이 60 조합이 갑자(甲子)로 시작하니 이들을 육십갑자라 한다.) 신살론과 격국론 등이 서술되어 있다. 3권은 육친론(六親論)과 소아, 여명(女命), 성정(性情), 질병(疾病) 등에 관해 논하고 있다. 4권은 신강ㆍ신약(身弱), 과갑(科甲-과거 관리를 뽑을 때 실시했던 시험), 인감론(人鑒論)과 열두 달의 건후(建候)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5권은 앞의 내용들을 암송하기 쉽게 시구로 만들어 실었다.

 

명리학은 청조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후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유물사관과 상충된다고 하여 배척되었으며 현재 대만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명리학

 

우리나라는 송과 교류가 빈번하였던 고려 초, 11세기 중에 자평법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 고려시대(918-1393)부터 태학에서 명리학을 가르쳤고 근세조선에서는 명리학이 성균관의 정규 교육 과목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의 국기에 태극과 음양이 있어 명리학의 학문적 기초인 음양론의 원천이 한국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있으나 문헌적 근거가 빈약하다. 조선의 명리학은 왕조가 정치 군사 과학 의학 등의 기초가 되는 학문으로 인정되어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명리학자는 관상감에 속하는 중인계급으로 잡과를 통해 관리로 채용되는 등 제도권에서 육성되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1894년 갑오개혁과 일제강점의 과도기를 거치며 우리 사회가 커다란 문화적 변혁을 맞이하며 조선의 명리학은 실종될 위기에 처한다. 일제는 한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자 자신들에게 필요한 한의학과 민족성의 저급화를 부추기는 점술 부분만 남기고 군사 과학 등에 유용되던 고급 명리학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광복 이후 민족의 주체성을 찾기 시작하면서 묻혔던 명리학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는데 1963년 백영관의 《사주정설》을 근간으로 재정립된 이후 스님과 역학자들이 주로 대만에서 서적을 유입하고 대학과 대학원에 명리학과가 설립되는 등 현대 명리학이 부흥하였다.

 

2000년대 이전의 시기가 간명의 적중률 향상을 위한 실관시대라고 한다면 현재는 이론과 실관이 병존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명리학이 대학으로 들어오며 방법론의 연구, 문헌과 명리사 연구, 명리로 예측하는 개인의 성격 유형, 체질에 관한 연구, 선천 적성에 따른 진로 추천, 심리 진단, 질병 예측 등의 학문적 성과가 많아지고 있으며 아울러 명리학의 기본 도구인 음양오행, 십간, 십이지 등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명리학이 과정이나 이론이야 어찌 되든 간명 결과만 맞으면 된다는 실관 위주의 관점을 벗어나 보다 합리적인 이론체계를 갖춘 동양의 미래 예측학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 다음 연재는 ‘2장 음양 1절 음기 양기의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