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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을 바쁘게 만드는 것이 훌륭한 경영자

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3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경영 이야기가 나오니 미스 K가 할 말이 많아졌다. 미스 K는 스파게티 식당을 열기 전에 잡지사에 근무했었고 한 때는 영화 회사를 운영하다 망한 적도 있었단다.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일하다가 극단을 만들어 운영해 본 경험도 있고. 이 일 저 일을 하다 보니 그녀는 나름대로 경영에 대해서 일가견이 생겼단다. K 교수가 “훌륭한 경영자의 특징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니 “자기가 데리고 있는 모든 사람을 바쁘게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미국 유학 시절에 겪었던 일이 생각나서 이번에는 K 교수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나는 1979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기 3달 전에 미국 뉴욕주에 있는 시러큐스(Syracuse)라는 작은 도시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시러큐스는 이탈리아 이민들이 개척한 도시인데, 마피아로 유명한 시실리섬에 있는 시라쿠사라는 항구도시와 지형이 비슷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인구는 25만 정도의 크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남들은 대학 졸업을 하고 바로 유학을 가는데, 나는 졸업한 뒤 학군단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5년 동안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뒤늦게 나이 30살이 다 되어 유학을 가게 되었지요. 나는 흙수저 출신이어서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적이 최상위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비장학금을 받지도 못했고요. 그냥 억지로 유학을 떠났고, 고학하면서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 아내는 중학교 영어 교사로 일했고 아들은 아직 두 살이 안 되었지요. 나는 아내와 아들은 시집으로 들여보내고, 미화 5,000달러를 쥐고 혼자 비행기를 탔습니다. 미화 오천 달러는 방 한 칸짜리 신혼집 전세금 그리고 2년 동안 저축한 돈을 합한 돈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하라면 아마 못할 겁니다.

 

나는 공항에서 눈물을 보이는 아내에게 비장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걱정마. 나는 반드시 해낼 거야.” 나의 계획으로는 다행히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면 가족과 합류할 수 있지만, 만일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한 학기 공부하고 한 학기 알바하고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 반드시 박사 학위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이었지요.

 

왜 그렇게 박사 학위에 집착하였느냐고요? 내가 연구소에서 5년 근무했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아 글쎄, 나하고 입사 동기들이 미국 가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대우가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박사 학위를 따오면 공용차로 출퇴근을 시켜주고, 숙직도 빼주고, 봉급도 껑충 뛰고 등등 대우가 확 달라지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결심했지요. 안 되겠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박사 학위 없이 연구소에 있다가는 속된 말로 배알이 꼴려서 못 다니겠다는 오기가 난 거지요. 그래서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무리하게 유학을 떠난 것입니다. 그때 미국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다행히 두 번째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게 되고, 1년 만에 아내와 아들을 미국으로 불러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학금으로 세 식구가 살기에는 생활비가 모자랐지요.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는 쇼핑몰에서 날마다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4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내가 일한 쇼핑몰은 <Peter’s>라는 이름의 대형 매장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대형 매장에서 일주일 먹을 식료품 등을 한꺼번에 삽니다. 여러 가지 식품과 상품을 카트에 담아 계산대로 오면 여자 점원이 계산하고 영수증을 찍어 줍니다. 이때 배거(bagger)라고 부르는 알바생이 상품을 종이봉투에 차곡차곡 넣어 카트에 싣고서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로 가서 트렁크에 짐을 부리고 카트를 다시 끌고 오는 일을 합니다. 별로 힘들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알바 일이어서 아프리카 유학생들이 많이 했습니다. 손님이 없으면 계산대에 있는 계산원과 서투르게 대화하면서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미국 사회를 알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지요.

 

그 매장에 매니저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죤이었고 한 사람은 죠셉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의 경영방침이 달랐습니다. 죤이 근무하는 날은 모든 배거가 다 바쁘게 움직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의 배거가 근무하는데, 한 사람만 일할 정도로 한가하면 그 즉시 죤은 나머지 두 사람에게 무언가 할 일을 지시하였지요. 흩어진 상품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으라든가, 대걸레로 매장 바닥을 청소하라든가, 등등.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우선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 뽑아서 같이 마시자고 주었습니다. 아마도 죤은 나보다 나이가 10살 정도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면서 영어로 말했습니다.

“너는 모든 사람을 바쁘게 만든다.” 그러자 죤이 대답했지요.

“그것이 좋은 경영자다.”

 

"방금 은경 씨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는 어디에서나 비슷한 가 봅니다."

“진리라고 말씀하시니, 뭐 대단한 것을 깨우친 것 같네요. 호호호.”

“그럼요. 은경 씨는 꼭 사업에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미스 K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미스 K가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자 K 교수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는 잊고 말았다. K 교수는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