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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문화 톺아보기

이재화거문고회-현묘, 거문고가 일깨운 시간의 울림

백낙준의 투리를 되살려 거문고 음악이 가진 공동체적 힘을 새삼 확인
[이진경의 문화 톺아보기 25]

[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지난 9월 21일 토요일 저녁 5시,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열린 이재화거문고회 창단연주회 「현묘(玄妙)」는 단순히 한 단체의 출범을 알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전통음악사의 맥락 속에서 오랫동안 잊히거나 변형되어 전해지던 풍류의 한 갈래를 다시 무대 위에 되살려낸, 역사적이고도 예술적인 사건이었다.

 

이번 무대에서 복원된 것은 1920년대 거문고 명인 백낙준(白樂俊, 1884~1933?)이 남긴 투리(投理)다. 투리는 그 이름조차 대중에게 생소하지만, 바로 그 낯섦이야말로 전통의 깊은 저변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의 값어치를 일깨운다.

 

이번 복원은 춘산 전재완이 1958년에 채보·발간한 악보를 근거로 이루어졌다. 전재완은 특히 서양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는데, 그의 채보 방식은 전통 정간보의 세로 배열과 달리 가로형 정간보를 택했다. 이는 전통음악을 서양 기보법적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시도이자, 전통과 근대적 음악 교육이 충돌하고 융합하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한다.

 

더구나 이 귀중한 악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이진원 교수가 제공한 자료로, 이번 무대를 위해 이재화 명인에게 전달되었다. 연구와 교육의 맥락에서 보존되던 악보가 실제 공연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이번 무대가 학술적 성과와 예술적 실천을 긴밀히 잇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보는 국립국악원 음계와 동일하여 겉으로는 경제 줄풍류의 음계를 따르고 있지만, 세부 구조에 들어가면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뒷풍류와 양청에 한 장단이 추가되어 있으며, 굿거리 장단이 포함된 점은 분명 향제풍류의 흔적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군악ㆍ계면ㆍ우조 장단을 양청과 동일한 2소박 4박자 계열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줄풍류가 사용하는 3소박 4박자 타령 장단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이 표기는 단순한 기보상의 차이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4박이라도 2소박과 3소박의 분박은 음악적 긴장과 이완, 움직임의 결을 전혀 다르게 빚어낸다. 양청 두 장단을 처리하는 방식에서조차 청각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드러나며, 그 결과 투리는 줄풍류와는 다른 독자적인 미감을 획득한다.

 

이재화 명인은 공연 앞머리에서 “국가에 받은 것이 많아 이를 음악으로 보은하고자 한다”라며 창단의 뜻을 밝혔다. 이는 단순히 한 예인의 겸허한 고백을 넘어선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곧 받은 것을 다시 돌려주는 행위, 다시 말해 세대와 세대를 잇는 순환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재화거문고회의 출범은 개인의 음악적 여정을 넘어, 전통의 역사적 부채를 현재의 무대에서 갚아내려는 집단적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풍류는 흔히 느리고 점잖게 다가와, 때로는 일반 청중에게 다소 지루한 음악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날의 연주는 그러한 선입견을 단숨에 거두어냈다. 절로 흥이 이는 선율은 산조의 무대에서나 들릴 법한 추임새를 불러일으켰고, 합주 속에 스며든 거문고의 중후한 음색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마이크조차 사용되지 않는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연주자들의 눈짓과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전해지는 공간적 친밀성은 거문고의 성음을 더욱 깊고 낭랑하게 드러냈다.

 

 

무대에는 박희정ㆍ이방실ㆍ전진아ㆍ박경은ㆍ김화복ㆍ손수림ㆍ안경화ㆍ김소량ㆍ황지영ㆍ김민서 등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거문고 연주자들이 함께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합주는 다층적이고 중후했으며, 각자의 해석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풍류의 다양성을 드러냈다. 장구는 홍석복(국립국악원 정악단 단원)이 맡아 장단의 맥을 이끌었고, 사회는 회장을 맡은 윤성혜(국립국악원 정악단 지도단원)가 무대를 정갈하게 엮어냈다.

 

이재화 명인의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백낙준의 투리를 되살린 순간, 그것은 단순히 한 악곡의 재현을 넘어, 거문고 음악이 가진 공동체적 힘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연주는 상영산에서 출발해 중영산ㆍ하영산ㆍ삼현ㆍ세환입을 거쳐 군악에 이르기까지 점차 고조되는 구조를 따랐다. 각 장단이 바뀔 때마다 음악은 새로운 표정을 띠었고, 특히 양청ㆍ군악ㆍ계면ㆍ우조에서 드러나는 2소박의 리듬감은 현행 줄풍류와는 전혀 다른 생동감을 불러냈다. 관객은 이러한 장단의 변화를 따라가며, 음악 속에 있는 긴장과 해소의 과정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솔로 연주에서는 각 연주자의 색이 독자적인 결로 드러났고, 합주에서는 거문고의 기세가 응집되어 그간 들을 수 없던 거문고라는 악기의 본령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특히 이번 무대는 거문고만으로 꾸려진 드문 연주회라는 점에서, 악기 자체의 음향적 세계와 미학적 가능성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더 나아가 오늘날 거문고 음악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복원을 넘어 한국 전통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재화거문고회 「현묘」의 울림은 오래된 선율 속에서 내일을 향한 숨결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