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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용기 있는 정치가를 보내며

강대국들이 만난 자리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었으면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32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국 북경의 시 경계에서 서남쪽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약 15킬로를 가면 노구교(盧溝橋)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곳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작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돌로 쌓아 올린 완평성(宛平城)이 있는데 이 성을 관통해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돌로 만든 다리가 하나 나온다.

 

11개의 아치를 이어 받친 길이 265미터의 이 돌다리 위에는 양쪽으로 난간이 있고 난간 사이로 281개의 난간기둥(望柱)이 서 있고 이 난간기둥 머리에는 각양각색의 돌사자가 조각돼 있다.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일어서 있거나 엎드려 있는 이 돌사자들은 자세도 다 다르고 더욱이 표정이 다르고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어떤 사자는 새끼를 데리고 놀고 있다(이것은 암컷이다). 어떤 것은 지구 같은 공을 발밑에 끼고 놀고 있다(이것은 수컷이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이 다리 위에 있는 사자가 모두 몇 마리인지를 세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도무지 셀 수가 없었다. 세다가 자꾸 틀리기 때문이다. 어느 끈기 있는 사람이 세어 본 결과 485 마리라고 하기도 하지만.

 

 

노구교(盧溝橋)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다리의 대명사였다. 위수(渭水)의 지류인 영정하(永定河)가 흐르는 이 강변은 예로부터 친구나 연인, 가족과 이별하는 장소였으며, 화북지방과 북경을 연결하는 교통의 목이었다. 여진족이 점령한 금(金)나라 때의 시인들의 묘사가 전해온다.

 

'해 질 녘 노구교의 버드나무여

이별하러 몇 번이나 서울을 나오는구나

                                落日盧溝橋上柳 送人幾度出京華'....조병문(趙秉文)

 

'출정하는 사람의 가장 좋은 망향처라 노구교 위의 달은 서리같네

                                最是出夫望鄕處 盧溝橋上月如霜'.... 고기원( 顧起元)​

 

전해오는 말로는 새벽(曉)에 서쪽으로 달(月)이 질 때 이곳의 경치는 다른 어느 곳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나라 때부터 '노구효월(盧溝曉月)'이란 말이 생겨나 연경팔경(燕京八景)의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청나라의 유명한 건륭황제가 이곳을 다녀간 뒤에 '노구효월(盧溝曉月)' 넉 자를 쓴 4.5미터의 높은 돌비석이 지금도 다리의 동쪽에 서 있다.

 

 

그러나 이 다리가 정작 유명해진 것은 중국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국인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중국 북부지방을 석권하고 세운 금(金)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정해 옮긴 이후 이곳의 전략적인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금(金) 세종(世宗)의 대정(大定) 2년인 1188년 그때까지 나무로 된 부교(浮橋) 대신에 돌로 다리를 만들기 시작해 만 3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그러므로 여기 다리의 돌사자들은 약 천 년 전 중국인들의 솜씨인 것이다. 그로부터 백여 년 뒤인 원(元)나라 세조(世祖) 곧 쿠빌라이 때 이탈리아의 유명한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지나다가 다리를 보더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며 그의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에 자세히 묘사해 놓아, 이 다리는 외국인들에게는 '마르코 폴로 브리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31년 9월18일 만철(滿鐵) 폭파사건을 조작해 이를 구실로 만주를 쳐서 점령한 일본은 중국 전체를 먹기 위해 북경을 칠 명분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1936년 가을에 북경 주위에 군사력을 집중시키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였다. 일본군들은 중국인들에게 위력을 과시해 공포감을 주기 위해 이들이 애써 가꿔놓은 면화, 배추 등의 농작물들을 마구 짓밟아 버렸다. 1937년에 들어서면서 일본군은 북경을 사면으로 포위하고는 노구교 일대에서 공공연히 무력연습을 벌이며 충돌을 유도했다. 그러다가 일본군은 드디어 득의의 작전을 다시 펼쳤다. 그것은 실종극이었다.

 

7월7일 밤 10시 40분 노구교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8중대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완평성의 중국군 본부에 사람을 보내어 병사 한 명이 실종됐는데 중국군 주둔지 쪽에서 총성이 났으니까 완평성 안으로 일본군을 들여보내어 조사해야 한다고 우기다가 중국인들이 응하지 않자 완평성에 주둔한 중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3천5백만의 중국인을 죽게 한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의 시발인 노구교사변이다.​

 

1995년 5월 3일 낮 2시 45분, 중국의 외빈용 차량으로는 최고급에 속하는 벤츠 600이 앞장을 서고 50여 대의 수행 차량이 열을 지어 이 다리에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자 바람에 날리는 듯한 흰 눈썹을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로 하루 전에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였다. 일본의 총리가 왜 이곳 노구교에 왔는가? 노구교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것인가? 그러나 무라야마 총리는 유명한 '노구효월盧溝曉月' 비 앞에서 8분 동안 머물면서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할 말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노구교 일대를 둘러본 뒤 항일전을 주제로 한 '혈육장성(血肉長城 피와 살로 쌓은 장성)'이란 조각대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는 조금 있다가 완평성 안에 세워져 있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념관의 장승균(張承鈞) 중국인 관장은 전시된 실물이나 모형, 사진자료, 통계 등을 보여주며 무라야마 총리에게 9.18사변, 노구교사변, 남경대학살, 중국 군민들의 용감한 대일항전 등을 설명해 주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무방비상태로 심양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군을 갑자기 습격해서 심양을 점령했습니다. 1937년 7월 7일 밤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실종됐다며 완평성 안에 들어와 수색하겠다고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총과 대포로 공격해 침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해 12월 일본은 남경을 점령한 뒤 중국의 군인과 민간인 30만 명을 무차별 살해하는 인류사상 유례가 없는 대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일본군은 살광(殺光: 모조리 죽인다), 소광(燒光: 모조리 불태운다), 창광(搶光: 모조리 빼앗는다)는 삼광(三光)정책으로 대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중국군민은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투쟁을 벌여 일본의 기도를 분쇄하고 반격해 냈습니다."

 

장 관장의 설명에 무라야마 총리는 가끔 머리를 끄떡이며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관람을 마친 뒤 총리는 방명록에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썼다.​

 

歷史を直視し日中友好,永久の平和を祈る.

'역사를 바로 보고 일본과 중국의 우호와 영원한 평화를 기원한다'​

 

기념관 관람을 마친 뒤 중국기자들이 무라야마 총리에게 소감을 묻자,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나는 미래의 평화에 대한 나의 결심을 더욱 새롭게 합니다.'​

 

무라야마 총리의 중국방문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한 50주년을 맞아 애초부터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서 중국에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을 표시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무라야마는 중국을 방문하는 보통의 외국원수들이 잘 찾지 않는 천안문광장 안에 있는 인민영웅기념탑에도 헌화했다. 더구나 노구교는 일본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찾은 것이었다. 중국지도부는 이 같은 일본 총리의 행보를 환영했다.

 

다만 북경주재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일본 총리의 중국방문을 보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이 있었다.

 

첫째 무라야마 총리는 중국방문에서 과거의 행위에 대해 반성은 했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과거의 침략 행위에 대해서 일본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은 했으나 그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공통된 인식이 아니라 무라야마 개인의 인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의구심이다. 무라야마 총리가 항일전쟁기념관을 보고 나온 뒤에 한 말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나는 미래의 평화에 대한 나의 결심을 더욱 새롭게 합니다'를 보면 '나는'이란 말과 '나의 결심'이란 말이 걸린다. 과거 전쟁의 역사를 반성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단순히 과거라고만 했다. ​

 

무라야마 총리는 그 전 해인 1994년 6월 취임한 이후 집권 사회당과 자민당, 그리고 혁신 정당들의지지 아래 아시아국가에 대한 침략을 사죄하고 일본이 다시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이른바 <부전결의(不戰決議)>를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바 있으니 그해 말 일본 내 12개 현 의회에서는 오히려 일본의 침략전쟁 중에 죽고 다친 일본인들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한다는 결의가 통과됐으며 일본 자민당의원 150여 명은 사죄를 반대하는 조직을 만들고 그룹별로 국회에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결국 1995년 6월 6일 일본 의회는 지루한 협상 끝에 '근대 역사상의 수많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적 행위를 유감으로 생각하며 일본이 과거 행한 이러한 행위 및 타국민들, 특히 아시아국민에게 가한 고통을 인식하고 깊은 반성의 뜻을 표한다'라는 내용으로 수정되어 확정되었다.

 

 

중국방문 당시 무라야마 총리로서는 이런 일본 의회의 옴직임이나 결의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으로 귀국한 이후에 일본 사회와 의회의 반발에도 8월 15일에 ‘전후 50주년의 종전 기념일을 맞아’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에 큰 손해와 고통을 줬다”라며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했다.

 

내각회의를 거친 담화에서 ‘통절한 반성’ ‘진심’ ‘사죄’ 등 명확한 표현으로 총리가 사과 견해를 밝힌 것은 처음이다. 무라야마 총리의 신념이 이 같은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집권한 역대 일본 정부는 이 담화를 계승한다는 태도를 밝히는 방식 등으로 사죄의 뜻을 대신해 왔다. 한일 양국 사이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기로 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역시 무라야마 담화가 토대가 됐다. 이런 관계 개선의 기틀을 무라야마라는 한 정치인이 만든 것이다.

 

지금 왜 무라야마 총리의 중국 방문 이야기를 꺼내는가? 바로 그 중국 방문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총리가 얼마 전 10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기에 고인의 정치 일정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중국방문에 얽힌 역사를 다시 기억해 주기 위함이다.

 

일본 총리의 중국방문은 여러 번 이어지고 있지만 일본이 중국에 준 피해를 반성하러 온 것은 무라야마가 처음이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과거 침략전쟁의 발단이 된 역사현장에 직접 가서 반성의 뜻을 표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10월 17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가 별세한 데 대해 애도를 표하면서 무라야마 총리의 이 노구교 방문을 다시 거론했다. 린젠(林劍)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무라야마 전 총리가 1995년 중국을 방문해 ‘역사를 직시하고 일중 우호와 영구 평화를 기원한다’라는 문구를 남겼다며 그가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전쟁 피해국에 사과했다”라고 평가한 것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1995년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도 발족시켰다. 정계 은퇴 뒤에는 아시아여성기금 이사장을 맡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금’ 모금을 추진했다. 그는 1999년에 초당파 방문단 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4년 2월 종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냉각되자 한국을 방문해 무라야마 담화의 의의를 알렸다. 2014년 10월 9일 한국의 숭실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수여 이유는 '일본의 만행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의미로 일본의 양심적 지도자인 무라야마 전 총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라는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도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의 별세에 "고인의 평안한 영면을 기원하며 그가 보여준 역사적 용기와 화해의 정신이 한일 관계를 넘어 동북아 평화의 가치로 오래도록 살아 숨쉬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또 "무라야마 담화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을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화해의 길을 제시한 역사적 이정표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역사 인식은 전쟁 80주년이 지난 올해라고 관련 당사국이 다 만족할 정도로 좋아진 것은 아니다. 각 나라의 입장, 각 정치인의 성향이나 역사에 관한 생각 등이 얽혀 복합적이다. 일본인들의 역사인식도 아직 미흡하다. 과거 일본이 당시의 지배자인 무사계급, 이어서는 군지휘계급을 중심으로 거대한 고무풍선을 불어 국민에게 거기에 도취하도록 한 적이 있지만 보다 많은 국민은 그러한 도취에 따라 더 쓰고 힘든 고통을 겪은 사실을 일본인들도 직시해야 한다.

 

무라야마 총리가 과거사에 대한 정리를 한 지 만 40년이 지난 올해 말 일본에서는 사상 첫 극우성향의 여성총리가 등장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새 총리(집권 자민당 총재)가 취임과 동시에 방위비 대폭 증액과 3대 안보 문서 개정 등 '뉴 재팬'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방위비 증액 압박, 중국의 해양 진출 가속화와 군사 위협을 구실로 삼아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과업이었던 '전쟁 가능 국가'로의 전환을 꾀하려 한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이런 행보가 앞으로 주변국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다시 관심이 쏠린다. 집권 자민당의 연정 상대가 '평화의 당' 공명당에서 '극우 성향'으로 평가받는 제2야당 일본유신회로 바뀐 것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도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어느 나라든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고 상대 국민을 괴롭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나라나 중국은 일본의 전향적인 역사인식을 늘 요구해왔지만, 일본 사회가 우리들의 인식이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그런 서로의 간격 사이에서 가장 대담하고 솔직하게 일본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사죄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는 역사인식 문제에 있어서 양심에 따라 용감하게 자기 할 말을 했고 그것을 위해 총리를 물러난 이후에도 일생을 바친 대단한 정치가였다.

 

이제 고인이 된 무라야마 총리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지만,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그의 선택과 행보는 기억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은 우리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역사 앞에 겸허히 서서, 무라야마 정신을 바탕으로 진정한 한일 관계 개선의 노력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마침, 이번 주 후반 미국과 일본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경주에 모인다. 이들의 모임을 통해 전쟁의 종식과 항구적인 평화의 기틀이 열릴 수 있을 것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나고 80년을 맞은 올해 강대국들이 모두 만난 자리에서 세계평화, 남북 사이 전쟁 분위기 종식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면 얼마나 좋은 일이 될 것인가? 고인이 된 무라야마 총리가 추구한 바가 그것 아닌가?

 

*요즘 중국어는 중국인들의 발음 그대로 적자고 해서 수도 ‘北京’을 ‘베이징’으로 표기한다. 다만 필자가 중국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90년대 중반에는 우리식 독음 표기가 흐름이었다. 중국식 발음 표기에 따른 우리들의 인식 혼란을 피하려고 이번 글은 우리식 독음으로 표기했다. 그래서 베이징이 아니라 북경이다. 이런 독음 표기를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