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여름 몽골행 비행기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엄청 많이 타고 있었다. 그들에게 왜 몽골에 가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필자처럼 몽골 밤하늘의 별을 보러 간다고 답을 한다고 한다. 필자도 그렇게 친구들에게 떠들었다. 그런데 정작 몽골 하늘에 진짜 우리 한국인이 별이 되어 높이 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그의 묘비를 보지 못했다. 관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알았으면 일정을 잡았을 터인데 그리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무척 죄송하다. 다행히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이 한국인의 기념공원을 찾아 묘비에 헌화하고 왔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해서 이 몽골하늘의 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태준이었다. 조선왕국에 외세가 몰려오던 1883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이태준은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고 24살인 1907년엔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3년 만에 졸업한 의사였다. 우리 국권이 일본에게 막 넘어가는 시기에 세브란스 의학교 재학시절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을 만난 것으로 그의 생애가 확 바뀐다. 도산은 이태준을 최남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 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베이셔도 마참네 제 뜨들 시러펴디 몯할 노미하니라 우리 한국인들은 이런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외우고 다닌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기에, 이 때문에 일반 국민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능히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들을 위해 한글이라는 문자를 발명해 주신 세종대왕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이 한국인 모두에게 있다. 그런데 이렇게 배우기 쉽고 쓰기 쉽고, 생각을 쉽게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이 글자가 조선 왕조 끝날 때까지 정식 글자로 사용되지 못하고 모든 공문서나 기록이 대부분 한문으로 표기됨으로써 우리 국민의 불편과 문화의 지체현상이 말할 수도 없었던 역사가 있었다. 한글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있다가 국문(나랏글)으로 선포된 것이 고종 때인 1894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 일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고종은 칙령을 통해 모든 법령을 국문으로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45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몽골초원은 이상하게 한국인들의 마음을 끈다. 올여름 많은 한국인이 몽골을 다녀온 것 같다. 나도 물론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몽골이 한국인들을 부르는 까닭으로 아마도 몽골이 우리의 조상들이 살던 곳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몽골 남서쪽으로 알타이산맥이 길게 흘러내리는데 우리가 쓰는 말이 우랄 알타이어족(語族)이라고 학교에서 배웠기에 아마도 우리가 거기서 왔을 것이란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친연의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올여름 같은 지독한 무더위에는 시원한 몽골에 가서 더위도 피하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도 보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도 얼마 전 몽골여행에서 알타이산맥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길고 긴 사막길을 달려 힘들게 찾아 들어간 알타이산맥. 높은 봉우리들이 길게 뻗어있는데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어있다는 얼음골 골짜기로 내려가는 작은 도랑 옆으로 돌무더기가 보인다. 형태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성황당과 비슷한 '어워'(예전에는 오보라고 알던 것인데 현지어로 어워라 한단다)가 아닐까, 생각했다. 알타이와 몽골초원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어머니 대지이며 한국인들의 문화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