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명창은 목이 잡혔다 트였다 하기를 수십 번 가슴이 붓고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고비를 거듭하여 비로소 목을 얻었는데 외삼촌인 국창 김창환의 소개로 25살에 서울에 올라와 첫무대에 섭니다. 그 첫무대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선풍을 일으킨 후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측음기판으로 음반을 내 1백20만 장이라는 지금도 이루기 어려운 판매기록을 세웠지요.
자신의 대명사처럼 유명해진<쑥대머리>를 부르며 임 명창은 일제치하의 암담한 민족현실과 가난에 대한 한스러움을 춘향의 신세에 대비해 울분의 소리를 토해냈습니다. 해소 때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임 명창은 1961년 부산 공연 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최초로 국악예술인장으로 장례를 치렀지요. 평생 양복 입기를 꺼리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던 그는 공연 때 소리의 왜곡이 싫어 마이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 돈은 어려운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임방울 명창의 쑥대머리를 들어보면 좋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