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지요.
그 만해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습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우장은 한옥이 모두 남향인데 반해 북향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만해가 해방을 한해 앞두고 세상을 뜬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