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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공습으로 재가 될 뻔한 추사 세한도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나듯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다 / 13년간 탐라도에 내동댕이쳐진 스승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멀고먼 땅 청나라에서 구한 책/ 눈물로 마주하며 스승과 주고받던 사랑/ 추사 선생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상적의 마음을 그린 것/ 대정고을의 가득한 푸른 솔향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라. -추사 유배지에서 ‘이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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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후지츠카 씨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졸업한 이래 47살 때인 1926년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한다. 이후 14년간을 조선에서 교수직을 하면서 추사연구에 몰두하는데 조선에 부임하기 전 그는 북경에 1년 동안 체류한다. 전공인 중국철학 자료 수집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북경에서 바뀌었다. 그는 중국인들이 추사의 학문세계를 높이 사고 있음을 발견하고 추사라는 인물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된다. 말하자면 경성제국대학 교수 부임은 추사연구의 더 없는 기회로 활용된 것이다. 그 뒤 후지츠카 씨는 조선에서 추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손재형 씨는 그런 후지츠카 씨를 병원으로 날마다 찾아가 간청하기를 ‘세한도는 조선의 것이다. 돌려 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 집요한 의지 때문일까? 결국, 후지츠카 씨는 아무런 조건 없이 세한도를 손 씨에게 넘겼다. 식민지 당시 조선 땅의 귀한 것들은 헐값 또는 반강제적으로 손쉽게 일본인 손에 넘어간 것들이 많은데 세한도처럼 순순히 돌아온 것은 많지 않다. 천만다행이다.

후지츠카 씨는 그의 아들 (藤塚明直, 1921-2006)에게 ‘조선의 유물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유언했다. 그렇다 해도 아들이 팔아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잘 지켰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2006년 2월 자신이 모은 영화관련 자료와 아버지가 모은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 류 70여 점 등 1만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현금 200만 엔까지 추사 연구에 보태라고 보냈다. 그리고 그는 유물을 모두 기증한 뒤 그해 94살로 숨을 거둔다. 세한도가 개인 소장품으로 조선 땅을 떠난 것은 유감이지만 무탈하게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다. 그 숨은 공로자는 손재형 씨이며 후지츠카 부자의 고운 마음씨도 일조를 했다. 잘한 일이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이윤옥(59y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