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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앞에 흔들리는 조국 / 안사람들이여 일어나라 / 며느리들이여 총을 메라 / 가서 아들을 돕고 남편을 돕고 / 의병장 시아버지를 따르라 / 가정리 여우내골 여자 의병 모아 / 쟁쟁한 독립군 키워낸 억척이 / 시아버지 남편 아들 조카 / 유씨 문중 뿌리 뽑아 독립에 바친 집안 / 돌비석 하나로는 다 기리지 못해...“ -이한꽃 “의병장 윤희순 중에서”-
을미의병부터 후기 정미의병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尹熙順, 1860.~1935. 8. 1) 은 8편의 의병가를 손수 지어 여성과 청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과 일본군을 꾸짖었습니다. 일가가 모두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항일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력을 다했던 보기 드문 항일독립투사 가족의 안주인이었지요.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살려 살아보세
임금없이 살 수 없네 임금살려 살아보세
조상없이 살 수 없네 조상살려 살아보세
살 수없다 한탄 말고 전진하여 왜놈 잡아
임금 앞에 꿇어앉혀 우리임금 분을 푸세”
시아버지 유홍석의 거병을 지켜보면서 윤희순은 의병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노래를 만드는데 “의병군가(義兵軍歌)”를 비롯하여 “안사람 의병가(義兵歌)”, "“병정가(兵丁歌)” 등이 그것입니다. 큰아들 유돈상이 독립운동 하다 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숨진 지 11일 만에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윤희순도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76살이었습니다. 남자도 못하는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유해는 1994년 고국으로 봉환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 양지바른 곳에 남편과 함께 합장 되었지요. 며칠 전 찾은 그의 관천리 무덤가에는 독립의 투지를 나타내듯 홍천강물이 쉬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멀리 뻐꾸기 소리가 무덤 찾는 이를 반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