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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끌고 '고바위'(?)를 올랐다

[≪표준국어대사전≫ 안의 일본말 찌꺼기(15)]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자장면 값이 오백 원에서 육백 원으로 올라가던 때였나? 나는 덕천동에서 청요릿집 배달을 했다. 면을 치는 소리를 들으면 왠지 후련했다. 교복도 자율화가 되어 공부에 대한 미련도 조금 옅어져 그냥 되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날따라 반주로 막걸리 반통을 먹어서 그랬는지 빈 그릇을 찾아오기 위해 '고바위'(언덕)를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시원스럽게 내리닫던 자전거에서 브레이크가 튕겨지던 느낌. 도로 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에 자전거가 대신 죽고 살아남긴 했지만 처음으로 죽음의 냄새를 뜨거운 짬뽕 국물처럼 뒤집어 쓴 것이다. - '내 마음속의 이곳'(부산일보) -" 

 고바위를 흔히 언덕배기쯤으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다. 예문을 찾다보니 어느 시인의 글이 올라와있다. 이 시인은 고바위라 써놓고 안심이 안 되는지 괄호 속에 “언덕”으로 다시 보충하고 있다. 시인 자신은 ‘고바위’로 많이 쓰고 있는 모양이다.
 

   
▲ 1934년 4월 21일 "남회선의 구배(코-바이)" 기사 (북선일보)

이 말은 일본말 코-바이(勾配, こう‐ばい)에서 온 말로 이 말이 와전되어 ‘고바위’가 된 것이다. 언뜻 보면 고(高)+바위 같아 순 우리 토박이말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국립국어원의《표준국어대사전》에는 노가다(막일꾼) , 몸뻬(왜바지) 같은 일본말은 실려 있으면서 ‘고바위’는 없다.

 다만 민간 사전인 《다음일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일본사전을 옮겨와 적고 있다.  “こうばい [勾配] : 구배.  1 물매. 기울기. 경사  (지붕의 기울기 : 屋根の勾配)   (경사가 급한[가파른] 비탈길: 勾配の急な坂道)   2 사면(斜面). 비탈. : 비탈을 오르다.(勾配を上がる)”

 한국에서 고바위(勾配)가 쓰인 이른 자료로는 1896년 5월 2일(명치29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의 ‘대동강개항예정지조사보고서(大同江開港豫定地調査報告書)’이다. 일본은 일찌감치 조선 침략을 염두에 두고 조선땅을 방방곡곡 조사하고 다녔는데 그때 ‘언덕배기’를 가리켜 ‘코-바이(고바위)라고 부른 것이다. 

이미 국민 사이에서 익숙해버린 말이긴 하지만 일본말 코-바이에서 변형된 ‘고바위’로 쓰기 보다는 언덕길, 언덕배기, 비탈길, 가파른언덕과  같은 알기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게 좋지 않을까?
 

 **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요즈음은 한 분야에 입문하여 10년만 공부해도 “전문인”이 되는 세상이다. 일본어 공부 35년째인 글쓴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글쓰기가 두렵고 망설여진다.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풀어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그거 좋다”고 하여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라는 부제의 책《사쿠라 훈민정음》을 2010년에 세상에 내어 놓았다. 이 책 반응이 좋아 후속편으로 2편이 곧 나올 예정이다. 내친김에 일반인을 위한 신문연재를 하게 되었다. ‘말글을 잃으면 영혼을 잃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애정을 갖고 이 분야에 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