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이순신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는 파직이 되었고 그의 강력한 함대는 원균에게 모조리 넘어갔다. 그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 움직이던 군사들은 이미 타인의 군졸로 변해버렸다.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의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이순신은 절망(絶望)적 상황이었다.
“내게는 육신(肉身)이 남아있고 정신(精神)이 살아 있나이다.”
이순신의 반박에 유성룡은 냉정했다.
“단지 그것으로 개천(開天)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소?”
“나의 하늘이 아니라 우리의 하늘이기에 가능 하외다.”
“확률이 낮은 승부에 모험을 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요. 장군의 의지는 그저 평범할 뿐이요. 나는 절대 무모하지 않소.”
서애 유성룡의 단호함을 지켜보면서 김충선은 의아했다. 일본인 사야가에서 조선인 김충선으로 변신한 그는 유성룡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순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그는 왜 이런 새벽에 귀중한 아들을 내보내어 이순신의 방문을 고대 하였는가? 그는 분명히 그들의 방문을 예견하고 있었다. 설마 이순신과 김충선에게 왕권에 대한 무모한 도전을 경고하고자 기다렸단 말인가.
“대감이 원하는 것은 진정 무엇이요?”
김충선은 직설적으로 유성룡을 향하였다. 이 사내는 언제나 술수(術數)가 보이지 않아서 좋다. 정직하고 도전적이다. 무술과 전략전술(戰略戰術)에도 뛰어 나지만 문사(文士)로서의 자질도 상당하다. 도량(度量)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제법 믿음직스럽기는 하다. 유성룡은 그 김충선을 의식하며 담담히 말했다.
“장군의 잃어버린 힘을 되찾는다면 그때 이 사람도 도모하리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즉 이순신이 강력한 위치에 다시 올라 서야만 유성룡이 합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쉽지 않은 주문이었다. 이미 모든 관직에서 밀려나서 일개 백의종군 하는 신세로 전락한 이순신에게 언제 다시 그런 기회가 올 수 있겠는가? 삼도수군통제사의 막강한 지위로 다시 복귀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지 대감이 모르신단 말입니까? 이것은 분명한 거절이 아니신지요?”
김충선은 집요하게 서애 유성룡의 의도를 파고들었다. 일국의 재상이 되어 구족이 멸문 당할 수 있는 역모(逆謀)를 획책 한다는 것 자체가 혼돈(混沌)이 아닌가. 그 파국의 소용돌이를 어느 누가 선택할 수 있을까? 유성룡은 김충선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는 오로지 이순신의 답변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바다를, 일본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장수는 없소!”
놀라운 자신감이었다. 김충선 역시 이순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언제나 사고력(思考力) 깊고 매사에 신중했던 이순신이 완벽하게 변모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성룡이 아들 유진에게 명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우리 조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어서 예를 올려라. 어서!”
유진이 즉각 무릎을 꿇었다.
“장군이 조선의 희망이십니다.”
유성룡의 심기(心機)를 어느 누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김충선이 비범함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일국의 재상으로 모진 당쟁(黨爭)의 풍파와 권력의 핵심에서 살아남은 서애의 노련함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