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한영 기자] 국제도시 서울에 상수도시설이 없었을 때 시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체계적인 물관리로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물이 나오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지만 그렇다고 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서울이 한양으로 불리던 시절 우물은 백성들의 중요한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 우물 겉 모습으로 화강암 두쪽을 댄 모습이다. |
조선시대에 종친부(宗親府)가 있던 터에 자리한 이 우물은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상부에 네 귀가 조각되어 있다. 내부는 자연석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는 이 우물의 원래의 형태가 아니고 1984년에 기무사에서 뜰 공사 도중 지하 3m에서 우물돌을 발견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 새로 조성한 것이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을 구조물 1점이 현재 이 우물 내부에 놓여 있다. 네 귀가 조각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우물과 같이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인 특징을 갖는 우물은 창경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원에도 있다.
▲ 우물 안쪽 |
이 우물은 원위치에서 옮겨져 원형은 잃어 버렸으나 표면 풍화상태로 보건대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상당히 오래된 우물로 판단된다. 또한 우물이 위치한 곳이 경복궁 동편의 역대 관청 건물지인 것으로 보아 조선 관청 우물의 형태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종로의 문화재
*위치: 서울 종로구 소격동 165 기무사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