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윤지영 기자]
성당 2층 창 너머로 보이는
황토빛 저 흙더미 속엔
내가 살던 집이 묻혀있다
내 아이의 어줍잖은 그림도
깨진 항아리도
낡아서 버린 구두도...
슈퍼, 약국, 목욕탕, 연탄집
모두 황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민희네 정우네 광수네 선진이네
저녁 어스름 해 기울고
황토는 말없이
세월을 삼킨다 -허선화 ‘수도국산 달동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어머니
그랬다. 달동네 사람들은 저녁 어스름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때 그 시절을 재현해 놓은 또 하나의 달동네가 자리하고 있었다. 살얼음 판 골목길을 재현해 놓은 달동네 박물관 골목길에는 낄낄 거리며 재미나게 옛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활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학생들이 있었다.
인천시광역시 동구 솔빛 51번지에는 송현근린공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공원 안에 이름도 특이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있다. 지금 박물관이 들어선 자리는 예전에 실제 달동네가 있던 곳으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산꼭대기에 서면 인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높은 곳이다.
▲ 재봉틀은 당시 재산목록 1호였다
달동네박물관이 있는 인천 동구 동인천역 뒤 산 이름이 수도국산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09년 산꼭대기에 수도국(水道局)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소나무가 많아서 예전에는 송림산(松林山)이라 불렸다. 한편으로는 만수산(萬壽山)이라고도 했던 곳이다.
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이 중구 전동 지역에 살게 되자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수도국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 일대 5만 5천여 평 규모의 산꼭대기까지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면서 이곳은 전형적인 인천의 달동네가 되었다.
▲ 달동네 골목 모습
그러나 지금은 고층아파트와 공원으로 꾸며져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2005년 10월 25일 문을 열어 당시의 생활상을 그려볼 수 있다. 마침 이곳으로 견학을 온 안산 본오중학교 학생들을 만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박현수 (본오중 2-9)군은 “어르신들이 살던 옛날 모습을 보니 물건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재미나지만 어렵게 살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손진호(본오중 2-12)군은 “연탄불 부엌과 비좁은 방을 보면서 조상들이 힘겹게 살았을 것” 이라고 했다.
▲ 단체 관람 온 안산 본오중학교 학생들
한편 기자와 함께 이곳을 찾은 도다이쿠코(도서출판 토향 대표) 씨는 “집이 달동네박물관과 가까이에 있어 일본에서 손님들이 오면 이곳을 자주 안내하는데 매우 흥미있어 한다. 그 어떤 박물관보다도 한국의 근현대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유익하다”고 했다.
나무로 재래식 화장실을 똑같이 재현해 놓은 모습하며 좁고 어둑한 뒷골목의 살얼음판 모습까지 실물처럼 만들어 놓은 달동네를 돌아보면서 6-70년대를 살아온 기자의 눈에도 어느새 그 시절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 연탄불을 갈아보는 도다이쿠코 씨
‘엄마 아빠 어렸을 적’이란 말을 넘어 이제는 ‘할매 할배 어렸을 적’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 손자손녀 뻘 되는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달동네 골목을 누비는 모습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달동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다만 순수하던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박물관의 한계 같아 아쉬웠다.
▲ 그 시절엔 이런 모자와 바지를 떠 입혔다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 오전9시~오후6시 (매주 월요일 휴관)
*지하철 이용 시 ‘동인천역’ 하차하여 4번 출구로 나와 ‘송현시장 입구 아치’를 지나 약400m 정도 오르막 길을 오르면 꼭대기에 박물관이 있다.
*전화번호 : 032-770-6130~4(문화체육과 박물관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