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축성을 총괄하는 총리대신 채제공과 화성유수 조심태는 애초 정약용이 계획한 대로
성곽의 길이를 4.2킬로미터(현재 5.7킬로미터)로 만들기 위해 화서문, 장안문, 북수문인
화홍문 등을 일직선으로 만들기로 추진합니다. 수원으로 행차한 정조는 팔달산 꼭대기에
올라 성터 전체를 내려보고 성문과 각종 시설물 등이 들어설 자리들을 확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조는 북쪽의 많은 백성의 집을 헐고 장안문을 지을 것이란 채제공의 대답에 “저 백성은 과거 예전 고을에서 살다 옮겨 온 사람들인데 또 집이 허물어지고 이사를 가야한다면 백성을 위해 성을 쌓고자 하는 나의 본뜻과 다르다.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저 백성의 집 밖으로 성문을 쌓으라”라고 명했지요. 이러한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안문 터는 원래의 위치가 아닌 민가 밖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