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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 181]지식인의 배반은 수백 배 더 나쁘다 -이종호-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육당 최남선

  일제강점기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처럼 남다른 생활을 한 조선의 지식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당은 조선이 일본 등 외세에 의해 수모를 당하는 것은 조선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숙지하고 190718세의 나이에 출판사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였고 창간호에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육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민족문화가 형성되고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민속·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정리·발간을 통해 밝히는데 주력했다.

이런 육당의 노력은 민족사의 테두리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함께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탐구하고 현양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조선정신(朝鮮精神)’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육당의 업적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한민족의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한 삼일(기미)독립선언서을 기초했다는 점이다.

육당은 삼일독립선언서를 기초했음에도 막상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당시 육당이 서명하지 않은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은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므로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지 않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여 민족대표에는 빠졌다는 것이다.

     3.1운동 직후 투옥된 모습

  그러나 삼일독립선언서작성의 당사자로 1919년 체포되어 다음해에 석방된 후 변절의 길을 걷는다.

이후 육당의 행보는 그야말로 놀랍다.

1922년에는 동명사를 세우고 잡지 <동명>을 발간하였다.

<동명>은 조선 총독 사이토와의 연줄을 배경으로 친일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던 주간지로, 대중을 선동하여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27년에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의 촉탁으로 위촉되어 일제의 뜻대로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개찬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조선인의 기초 역량 육성에 뜻을 두었던 일제 강점 초창기와는 달리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40년 만주지역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귀순 및 투항공작, 1943년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군 학병참여 독려 강연 등 뚜렷한 친일 행적으로 일관했다.

학병참여 독려강연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다.

대동아의 성전은 세계 역사의 개조이므로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조선화보>(19441월호)에 육당과 춘원의 대담은 매우 충격적이다.

춘원이 육당에게 학병참여 독려 강연회를 할 때 육당의 말을 듣고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다고 하자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100년 편지. 173. 최남선 崔南善 선생님에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천재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 조선청년들에게 전쟁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하라고 독려했고 그 강연에 대해 자랑스럽다는 투로 말했다는데 황당했고 소름끼치는 모습이라고 적었다.

         공판정에 나온 최남선

  1945815일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9491,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지만 곧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반민특위가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

그런데 19493, 육당은 <자유신문>학병참여 독려강연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적었는데 육당이 조선독립국의 출범에 대비한 실력양성의 관점에서 조선학생들에게 학병참여를 독려했다는 변명에 최남선 崔南善 선생님에게는 다음과 같이 육당에게 반문했다.

전쟁에 나가 황국을 위해 죽는 것이 실력양성입니까? 학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이들은 실력양성의 책무를 던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까?”

  육당의 이런 설명과는 달리 학병참여 독려강연을 함께 했던 춘원은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적었다.

과거 7, 8년간 내 길... 내가 조선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고야마 고로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육당은 친일행위에 대해 변명으로 시종일관했지만 춘원은 그나마 반성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남선 崔南善 선생님에게에서 문학평론가 고 김현이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친일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고 말했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파란 가을하늘이 마냥 파랗게 보이지 않는다고 마무리했다.

이종호는 이 글을 읽고 김현처럼 육당과 춘원의 친일이 우리 모두의 상처이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시각도 있지만 육당 등 지식인들의 행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드렸다.

  그런데 육당과 춘원과 같은 조선 지식인들이 유럽의 나치 통치하에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제강점기와 나치의 유럽 점령을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 없으므로 육당과 춘원의 경우를 나치 점령지의 지식인들과 비교한다는 것이 옳은 것이냐 아니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육당과 춘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라는 자체가 세계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들의 행보가 동시대 유럽에서는 어떻게 평가되었을까하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을 먼저 단죄>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 국은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이 당시 드골이 규정한 민족반역 범죄자는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공직자들과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인들이다.

  드골이 나치협력자 청산에 있어 프랑스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언론인들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한다

수많은 신문사 사장, 언론인들이 민족반역자로 재판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은 천재교육대학으로 유명한 그랑제꼴인 파리고등사범(에꼴노르말)출신으로 작가이자 언론인인 브라지야크이다.

그가 19451월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36세에 불과했다.

  그의 재판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에콜노르말을 졸업한 프랑스가 낳은 보기 드문 인재라는 프랑스인들의 인식 때문이다.

에콜노르말은 한 해 입학생이 80~1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프랑스의 한 해 대학교 입학생은 대체로 약 50만 명).

또한 프랑스를 통틀어 상위 그랑제꼴 정원은 년 1천여 명 정도이다.

브라지야크는 입학하기 어렵다는 에콜노르말 역대 졸업생 중에서도 최고의 천재라고 알려진 당사자였다(경쟁률이 10~100배에 달함).

  문제는 브라지야크의 나치협력이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했다는 점이다.

그는 드골 장군을 필두로 하는 <망명정부 자 프랑스> 요원 및 레지스탕스들은 테러분자이므로 엄벌해야 한다고 많은 글을 썼으며 독일에서 열린 히틀러 찬양세미나에 참가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천재 중 천재로 알려진 브라지야크는 프랑스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검사로부터 더욱 큰 질타를 받았다.

검사는 보통 사람의 배반보다 브라지야크와 같은 지식인의 배반이 수백 배 더 나쁘다고 말하며 그를 단순한 나치협력 배반자보다 더 악질인 지성적 반역자로 규정했다.

  나치에 부역한 죄상을 볼 때 사형선고가 이미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그의 재판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의 죄가 뚜렷하지만 그의 천재성이 안타깝다고 사면을 바랐다는 점이다.

또한 브라지야크가 프랑스가 탈환될 때 독일로 도망갈 수도 있었음에도 프랑스에 남아 있으면서 자수했다는 점도 그에 대한 구명운동에 큰 힘을 주었다.

그는 나치협력신문 <새시대>의 편집국장이며 언론노조 회장인 쟝 뤼세르로부터 파리를 철수하는 나치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피신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단연코 거부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며 레지스탕스 운동과 저항 언론을 주도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보인 행동이야말로 브라지야크를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 가를 알려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나치협력자 청산을 강력히 주장한 장본인이다.

누가 감히 (나치협력자에게)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칼은 칼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고 무기를 잡아야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우리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이 진리를 망각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브라지야크의 감형탄원서에 서명하여 드골에게 보냈다.

물론 여류작가 시몬 드 보브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브라지야크에 대한 감형탄원서의 서명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연대하는 작가 언론인들은(나치독일의 게슈타포에 의해) 모두 억울하게 죽은 레지스탕스 지식인들이다. 만일 내가 브라지야크에게 유리하게 손을 놀린다면 죽은 사람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 확실하며 그래도 나는 할 말이 없다.”

프랑스 지식인 59인이 서명한 진정서를 받은 드골은 그들의 탄원을 기각했고 브라지야크는 사형선고를 받은 지 2주 후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브라지야크가 워낙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지식인에 대한 조사는 유명 지식인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드골은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 비시 정권의 고위 관리들을 숙청한 후 각계에 뿌리박은 나치협력자 또는 부역자들을 철저히 숙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민족을 배반한 경찰과 판검사가 나치협력자를 심판할 수 없다는 대 전제아래 경찰과 사법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여 1944년 말에 이미 5천여 명이 경찰이 체포됐다.

403명의 판사들이 나치협력 혐의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체 판사의 17퍼센트에 이르는 수치였다.

  드골이 집행한 프랑스의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에 대한 숙청 논리는 다음 말로 축약될 수 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이념을 달리한다고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역적은 아니며 단지 국가의 관리와 경영을 달리하는 이념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당대의 지식인인 육당과 춘원의 친일은 일반인들의 친일과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브라지야크의 재판을 담당했던 검사가 보통 사람의 배반보다 당신같은 지식인의 배반이 수백 배 더 나쁘다고 말한 것은 지식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반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마디로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의 행보가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인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행보이다.

조선 지식인들이 일제의 압박이 심해진 일제 강점기 후반기에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친일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비야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한민족의 특성 때문이라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지식인으로서 일제에 부역했다는 것은 부역한 사람의 개인적인 사항에 따라 취해진 조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육당이나 춘원과 같은 당대 지식인들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이 역사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은 뼈아픈 일제강점기를 거쳐 세계에 유래가 없는 동족상잔(同族相殘)으로 시종 일관된 한국전쟁이 벌어졌음에도 세계 10여개 국의 경제 강국 반열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남다른 세계의 한 축을 움직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적어도 일제강점기와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난다면 육당과 춘원과 같은 전철을 밟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숙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육당과 춘원의 친일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이므로 만지는 것조차 기피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지식인들에 의한 상처일수록 보다 자세하게 파악한다면 이를 토대로 미래를 열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친일행동을 자세히 아는 것이 결국 한국의 미래와도 직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알베르 카뮈의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과학국가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