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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통일소' 방북…정주영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세기의 사건'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① 소떼 방북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DJ 재벌개혁 서슬 칩거하던 정 회장 "1000마리 에 보내겠다"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 "휴전선 개방됐다" 외신전문가들 극찬
이어지는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합의 남북경협 확대교류 물꼬 터
[내년 탄생 100주년-소처럼 우직했던 천재적인 뚝심의 기업가]

내년이면 현대그룹을 창립한 고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지속가능 경제를 이끌고 있는 그린경제는 기업인은 많아도 사람냄새 나는 기업인이 적은 현실에서 한국경제의 거목 정주영 회장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정주영 회장은 우직한 소처럼 기업을 일군 기업경영자로서, 더 나아가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거인이었다. 기업가 정주영 회장의 삶은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말>


오전 임진각. 화환을 목에 건 황소 옆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한 마리의 소가 1000 마리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1998616일 언론은 이렇게 83살의 정주영 회장이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이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 1998년 6월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 회장은 남북 민간 교류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실향민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 그는 17살 때 현재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아버지가 소 판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했는데 그의 나이 83살이 되던 1998616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하게 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 방북을 기획한 것은 1992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사 방목하도록 했고, 소떼 방북당시 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 간척지에 만들어진 현대서산농장 70만 평의 초원에 3000여 마리의 소들이 방목되고 있었다.
 

1998616일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 십대에 실린 북한에 줄 소 1차분 500마리가 판문점을 넘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4달 뒤 또다시 501마리의 소떼는 판문점을 넘었다. 이때 현대그룹은 소떼 방북에 트럭과 사료를 포함하여 417700만원의 비용을 부담했다.  

북한은 소떼 천 마리가 무척이나 반가웠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2차 방북 때 김정일 위원장이 정 회장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아왔을까? 정주영 회장의 방북 4일째인 630일 오후 1025분쯤 정 회장이 묵고 있는 평양의 백화원초대소에 김정일 위원장이 나타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방북은 당시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남북관계가 풀리고 민간차원의 경제협력과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정 회장은 1차 방북 때 8일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북측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 등에 합의했다. 2차 방북 직후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어 19981118'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이후 20006월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이런 성과야말로 정주영 회장이 남북의 물꼬를 튼 덕분이 아니던가?  

19986월은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기였다. 외환위기와 함께 닻을 올린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재벌개혁을 요구했다. 재벌들이 먼저 외환위기 극복에 모범을 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사재 1000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했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공들였던 삼성자동차 사업부분의 빅딜을 위해 사재 1조원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재벌에 뒤질 것 없는 현대 정주영 회장은 웬일인지 한동안 조용했다. 그렇게 조용히 칩거를 끝낸 정 회장은 북한에 소 1000 마리를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소떼 방북 발표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카드였다. 더구나 당시는 소 천 마리를 보내는 일은 비행기로도 배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가장 쉬운 방법은 판문점을 통한 육로이동이었지만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정 회장의 뚝심은 민간기업이 정부의 허가를 받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고 만 것이다. 당시 소떼 방북 장면은 CNN에 생중계되었으며 외신들도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휴전선이 개방되었다고 앞 다투어 보도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며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이를 두고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극찬했다. 특별히 광고비를 들이지 않고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대단한 일을 그는 해낸 것이다 

 

   
▲ 1998년 6월 소떼 방북 뒤 귀국하는 정주영 회장. 사진 왼쪽은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정주영회장의 소떼 방북은 어쩌면 정주영이란 사람이 내면적으로 추구해온 철학의 표출인지 모른다
. 아니 한 사람의 기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일찌감치 하나하나 차분하게 짚어나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점을 사람들은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소떼 방북에서 보듯 정 회장은 아무도 선뜻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천재적이면서 뚝심의 기업가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 회장이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또 한 가지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6년 어느 여름날 박정희 대통령이 정 회장을 불러놓고 임자, 달러를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곳이 있는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네. 그래서 나도 정 회장이 안 된다고 하면 포기 하려고…….”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그곳이 중동이라고 했다. 중동은 당시 석유파동으로 달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거머쥐었고, 이 달러로 건물도 짓고 싶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낮에는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고, 한해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물론 물마저 없으니 건설공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 회장은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가보겠다고 했다. 그 길로 중동지역 시찰을 마치고 이윽고 닷새 만에 돌아온 정 회장은 중동이야말로 건설공사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한해 내내 비가 안 오니 쉬지 않고 공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이 현장에 널려 있으니 얼마나 공사하기에 좋은 곳입니까?” 

박 대통령이 공사에 필요한 물과 더위를 어찌할 것인가 묻자 물은 다른 곳에서 실어오면 되고, 50도 되는 더위에 낮에는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천막 치고 잔 다음 밤에 일하면 된다는 답을 내놓았다. 이에 감탄한 박 대통령은 정 회장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정 회장은 중동을 또 한 번의 엄청난 도약을 이루는 발판으로 만들었다. 현대그룹 중심기업인 현대건설이 건설업계 으뜸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鄭周永, 19151125~ 2001321)을 다시 확인해보자. 정 회장은 현대그룹의 창업자로 명예회장이었으며,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모범 본보기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하여 운영하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으며,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고 건설업을 시작하면서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켜 성공했다.

정 회장은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 9위를 차지할 정도로 탄탄한 사업체를 일구었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했는데 19986월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이름을 붙인 소 10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정치에도 뛰어들어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에 선출되었으며,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9212월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력 몇 줄로 정주영 회장을 정리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그 만큼 그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하다. 정주영! 그는 단순한 기업인이나 정치인으로 머문 사람이 아니다. 요즈음 기업인은 많아도 사람냄새 나는 기업인이 적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이러한 때에 우직한 소처럼 기업을 일군 기업경영자로서 더 나아가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한 시대를 살다간 정주영 회장의 삶을 찾아 새롭게 대장정을 출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