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으랴 / 핏덩이 아들 두고 늙으신 노모 앞서 죽음 택한 의병장 남편 / 왜놈 칼 맞아 선연히 배어든 피 묻은 속적삼 / 부여잡고 울 수만 없어 /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떠난 만주 땅 / 곳곳에 병들고 상처받은 동포들 삶 / 보살피고 어루만진 따스한 손 (뒤 줄임) 이는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 실린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이란 제목의 남자현 애국지사께 드리는 헌시의 일부입니다. 여자 나이 46살에 압록강을 건너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남자현 애국지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19살에 결혼하여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한 남편 김영주 애국지사의 숭고한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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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왓장에 새긴 남자현 애국지사(오른쪽), 아들 앞에서 숨져가는 남 애국지사(경북독립운동기념관)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김영주에게 시집 간 열아홉 새댁은 단란한 신혼 생활도 채 누리지 못한 채 의병에 가담하게 된 남편이 그만 전사하자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을 홀로 키우며 일본에 복수할 날을 기다립니다. 남자현 애국지사는 기회를 엿보다가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몰려드는 독립군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쏟게 됩니다. 망명생활 6년째인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거사를 추진하기도 했지요.
뿐만 아니라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약손가락을 잘라 흰 무명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내 조사단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왜경에 잡히자 1933년 8월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 끝에 먼 이역 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죽는 날까지 애오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뛴 남자현 애국지사는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살을 일기로 중국 땅에서 순국하셨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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