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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오고[午鼓)와 인경종[人定鍾], 광화 문루(門樓)에 복원해야

광화문과 현판의 역사복원 문제(3)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문화재청은 광화문을 고종 때 중건 당시의 위치에 원형 복원하면서 누각 안에 걸려 있었던 종과 북도 관련 고증자료 등을 검토해 복원키로 했다고 알려졌다. 문화재위원회가 20054204개 분과 합동회의에서 "광화문의 외형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도 고증해 복원토록 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합동회의에서 남문현(南文鉉·건국대 교수) 문화재위원은 "조선 초기 광화문 전각에 시간을 알리는 종과 북이 있었던 만큼 이 부분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태조실록4(1395)"광화문 누각은 3칸으로 상하층이 있었으며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임금의 거둥을 알리는 신호)을 경계했다"고 기록돼 있다 [원문 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 以限晨夕警中嚴門南左右, 分列議政府三軍府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이 기록에는 광화문이란 이름이 태조 때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 52, 13(1431) 4`18(임자) 1번째 기사에는 단지 광화문이 이룩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남 교수는 "광화문 전각에 있던 종과 북은 경복궁 경회루 부근에 있던 보루각의 자격루(자동울림 물시계)가 저녁 통행금지의 시작(인정·人定)과 해제(파루·罷漏)시각을 알리면 이를 종로의 보신각으로 보내는 중계소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광화문 내부의 시설물과 관련해 확보하고 있는 자료가 부족해 고민하고 있다그래서 "삼성출판 박물관이 소장 중인 '경복궁 전도' 등을 수집했지만 내부 시설을 보여주는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2014년 현재까지 인경종과 오고는 복원 되지 않았다. 지난 시절 역사 복원이란 말을 앞세우면서 콘크리트 광화문을 헐고 현판을 복원한다고 했지만 규격 미달의 복제 현판 문제(투고 1)와 칫수 고증의 의구심(투고 2회 참조)을 야기 시켰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목조 문루에 인경 종을 걸어 둘 대들보[]나 오고를 설치할 문제를 미리 마련해 두었는지가 의문시 된다. 왜냐하면 광화문 문루 안경 종은 규모가 큰 거종[巨鐘]이기 때문이다. 

인경종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분명한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전국의 요충지와 큰 절에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는데, 2(10시경)에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의 시작을 알리는 종 또는 그 시간을 인경이라고 했다. 표기는 인정(人定)으로 했으나, 후대에 와서 인경으로 발음했다. 이때 종을 28번 쳤는데, 이는 일월성신(日月星晨)28[二十八宿 : 하늘의 적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별자리를 28개로 구획한 것]의 뜻으로 28수에 고하여 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5(새벽 4)에 쳐서 통금해제를 알리는 종은 파루(罷漏)라고 했다. 이때는 33번을 쳤는데,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33()에 고하여 그날 하루 '국가의 태평과 민의 안정'[國泰民安]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통금기간 동안은 순관(巡官)과 군사들이 성내를 순시했으며, 성문을 지키고 순찰하는 군사들에게는 군호(軍號)가 배부되었다. 통금을 위반한 자는 다음날 곤형(棍刑)을 받았는데, 초경과 5경에 적발되면 10, 2경과 4경은 20, 3경은 30대였다.  

군호를 모르면 통금위반으로 간주했다. 궁 안의 하인들도 홍의(紅衣)를 입지 않고 통금을 위반하면 즉시 곤형에 처했다. 공무질병생산사망 등 급한 용무가 있을 때는 본인이 순관이나 야간초소인 경수소(警守所)에 사유를 고하면, 순관이나 군사가 목적지까지 동행하여 인도하게 했다. 통금중 성문을 열 필요에 대비해서 매일 승정원에서 금군(禁軍)에게 부험(符驗)을 배부하는 경마다 다른 부험을 사용했다.

 

   
▲ <지도> 보루각- 광화문 문루인경-보신각까지의 중계경로

 

광화문 인경종의 내력 

흥천사 동종( 보물1460 ) 대원왕 중건 당시에 인경종으로 달았다. 높이 2.82m, 지름 1.70m, 두께 3m(무게 모름)의 이 종은 14627월 조선 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신덕황후의 무덤 근처 흥천사[정동]에 있었으나 중종 5(1510)에 방화로 소실되어 영조 23(1747)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이 기록은 석연치 않다.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중건 되지 않았다. 문루 보다는 삼예문에 세웠지도 모른다] 흥천사 동종이 왕실 박물관[창경궁]으로 들어온 것은 19109월 이었다.그 직전까지 경복궁 광화문 루에 놓여 있던 것을 마키노 츠도무(牧野務)라는 일본인 골동상이 떼어다가 거금을 받고 팔아먹은 것이 이 유물의 반입경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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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 동종(보물 제1460호), 문화재청

흥천사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된 중국종 같은 요소 가운데 한국 전통 종에서 보였던 형식과 요소가 가미되어 새로운 조선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전기 범종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천사종은 다른 조선전기 범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크기나 무늬나 주조기술의 탁월함 말고도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종이어서 각 분야의 관장(官匠)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종에 새긴 글자는 종을 만들 때의 조직체계를 알려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당시의 사회 제반 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종이 경복궁 광화문 문루에 걸리게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청오 차상찬(靑吾 車相瓚) 선생이 조광(朝光)19388월호에 기고한 '덕수궁으로 온 흥천종의 내력'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고종3년에 경복궁이 낙성되고 광화문이 또한 신축되니 대원왕께서는 그 문루에다 종을 둘 필요를 크게 느끼시고 물색하는 중에 내가 선두로 간택이 되어 그 문루로 옮겨가게 되었었다."  


   
▲ 흥천사 동종의 내력에 관해 정리한 글 하나가 <조광> 1938년 8월호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흥천사 동종을 내 창경원에서 덕수궁으로 옮겨오는 데 그 해 5월 29일부터 6월 3일까지 무려 6일간이 걸렸다고 적고 있다.

   
▲ 흥청사종(광화문루) – 세기노 & 로제티

   
▲ 사닌- 광명문에 있는 흥천사 동종
1902 년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촬영한 사진자료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수록된 것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25(1443) 1024(을사) 3번째 기사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조참(朝參)을 받을 때에는 초엄(初嚴)을 초고(初告), 이엄(二嚴)을 이고(二告), 삼엄(三嚴)을 삼고(三告)로 이름을 고치되, 모두 북을 쳐서 절조를 하고, 초고에 다 모이고, 이고에 문밖에 나오고, 삼고에 뜰에 들어오게 하소서. 만일 광화문(光化門)의 북을 치면 조회에 혐의스러우니, 청하옵건대, 계조당(繼照堂) 뜰 문밖에 따로 북을 설치하여 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기사에서 광화문루에 설치한 오고 이외 계조당 뜰 문밖에 따로 북이 있었음을 얘기한다

 

   
▲ 창덕궁 돈화문


맺음

여러 문헌에 따르며 광화문에는 오고와 인경종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인경 종은 중종 때 흥천사가 방화로 불탔을 때 흥천사 중은 동대문에 종루에 걸렸다가 영조때 광화문 인경종으로 걸렸다. 아마도 문루가 아니라 삼예문 근처에서 타종하다가 1861년 대원왕에 의하여 정식으로 문루에 걸렸으나 1910년 다시 창경궁으로 이전되고 그리고 또 덕수궁으로 옮겨왔다.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몸소 부대끼고 견뎌온 역사적 유물이다. 이제 복원 광화 문루에 당당히 제자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오고도 함께 설치하여 12시 인경과 파루 를 알리는 행사를 거행해야 한다. 고궁 박물관에 복원된 자격루는 원래의 자리인 흠경각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시각릏를 알리면 광화문루의 오고와 인경종 그리고 보신각 으로 이어지는 체계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덧붙임 : 고종 2, 2(1865 을축 / 청 동치(同治) 4) 917(기묘) 2번째기사에

"영건 도감(營建都監)에서 경복궁(景福宮)의 각 전(殿)과 당(), 각 문의 현판(懸板)을 쓸 서사관(書寫官)<교태전(交泰殿)에는 조석원(曺錫元), 강녕전(康寧殿)에는 이재면(李載冕), 연생전(延生殿)에는 이재원(李載元), 경성전(慶成殿)에는 조성하(趙成夏), 함원전(含元殿)에는 조영하(趙寧夏), 인지당(麟趾堂)에는 이주철(李周喆), 천추전(千秋殿)에는 정범조(鄭範朝), 만춘전(萬春殿)에는 송희정(宋熙正), 광화문(光化門)에는 임태영(任泰瑛), 건춘문(建春門)에는 이경하(李景夏), 영추문(迎秋門)에는 허계(許棨), 신무문(神武門)에는 이현직(李顯稷)이다.>라고 별단(別單)으로 써서 아뢰었다."  

경복궁을 복원할 때 수많은 현판과 전당과 문의 현판 글씨를 여러 사람에게 의뢰하여 썼다. 하지만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이들의 휘호를 감안해서 복원했는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왜 하필 임태영 휘호만 원형을 고집하는가?에 대하여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