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서울(도읍지 금성, 현재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 이 노래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 입니다. 이 처용가를 바탕으로 한 궁중무용 “처용무(處容舞)”가 있습니다. 처용무는 원래 궁중 잔치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비손하거나 음력 섣달그믐날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儺禮)에서 복을 빌면서 춘 춤이었지요.
▲ 남자들이 오방색 옷을 입고 추는 처용무(문화재청 제공)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 조에 보면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랑·검정·빨강·노랑의 옷을 입은 5명의 남자들이 추지요. 처용무의 특징은 자신의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을 분노가 아닌 풍류와 해학으로 쫓아낸다는데 있습니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용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재위 1469∼1494)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단되어 오다가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는 가면과 옷·음악·춤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무용예술로, 춤사위나 반주음악 또는 노래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맥을 즈믄 해(천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는 예술성이 풍부한 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