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임금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가니, 왕세자와 종친과 신하 50여 명이 따랐다. 임영대군 이구, 한남대군 이어에게 궁을 지키게 하고, 이 뒤로부터는 종친들에게 차례로 왕래하게 했다. 임금이 가마골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쓰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나무인형이 스스로 북을 쳤다.”
위 내용은 《세종실록》 23년(1441년) 3월 17일 기록입니다. 여기서 온수현은 지금의 온양인데, 세종이 왕비, 왕세자와 더불어 온천에 가는 길이었고, 이때 처음 “기리고차”란 것을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던 조선시대 반자동거리 측정 기구입니다. 장영실이 중국식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는데, 각 도, 각 읍 간의 거리를 조사하여 지도를 작성하는 데 기리고차가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문종 1년에는 제방공사를 하는 데 있어 기리고차를 이용하여 거리를 재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목공사에서도 널리 쓰였을 것입니다.
▲ 국립과천과학관에 국내 최초로 복원 전시된 기리고차의 모습
▲ 옛 문헌에 기록된 기리고차 모습(왼쪽), 기리고차를 응용하여 그린 수선전도 필사본 - 문화재청 제공
이 기리고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 다만,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1731~1783)이 쓴 《주해수용(籌解需用)》 에 그 구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거리 측량은 이동하는 바퀴의 회전수에 비례해서 종과 북소리가 울리고 이 울림의 숫자를 기록하여 실제 거리를 측정하는 데 쓰였다고 하지요. 오늘날 택시도 타코미터(Tachometer)라는 기구를 써서 거리를 재고 요금을 산정하는데 원리는 기리고차와 비슷합니다. 요즘 개발된 정밀한 거리 측정 장치들과 비교해도 그 원리나 우수성에 있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기리고차, 국립과천과학관 2층 전통과학관에 가면 국내 최초로 복원 전시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