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첫째 절기인 입춘(立春)입니다. 사람들은 이날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데 입춘축을 달리 춘축(春祝)·입춘서(立春書)·입춘방(立春榜)·춘방(春榜)이라고도 하지요. 입춘축에는 흔히 쓰이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말고도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랍니다.),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잡귀야 달아나라."고 써 붙이는 곳도 있고, 한지를 마름모꼴로 세워 ‘용(龍)’자와 ‘호(虎)’자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이기도 하지요.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경기도 산골지방(畿峽)의 6개 읍[양근(楊根), 지평(砥平), 포천(抱川), 가평(加平), 삭녕(朔寧), 연천(漣川)]에서는 총아(芽, 움파)·산개(山芥, 멧갓)·신감채(辛甘菜, 승검초) 등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어 임금께 진상합니다.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五辛飯, 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을 장만하여 수라상에 올렸습니다. ▲ 입춘 절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지 않겠느냐.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 이는 원효대사가 신라의 요석공주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지어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도끼는 나무를 찍거나 패는 연장의 하나로 중세 국어에서는 ‘돗귀’였으며 이는 ‘돓(石)’과 ‘귀(耳)’가 붙어서 된 말로 ‘도최’라는 말로도 쓰였는데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도끼를 ‘도치’라고 하지요. 이러한 도끼는 왕의 예복이나 수렵옷, 병풍, 휘장 따위에 도끼 무늬를 새겨 넣어 통치자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거나 아낙네들 사이에서는 작은 도끼 노리개를 차면 임신이 잘된다고 믿었습니다. 도끼는 연장의 뜻 말고도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예전에 사람이 죽어 상여가 나갈 때 상여 앞뒤에 세우는 것을 보삽이라 했는데 보삽(黼翣)에는 흔히 도끼를 그려 넣습니다. 악귀가 다가서는 것을 막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세종실록 92권 (1441) 5월 18일 기록에는 “벼락이 떨어진 곳이나 또는 토목(土木) 가운데서 도끼자루 모양의 물건을 얻게 되는데, 이를 벽력설(霹靂楔)이라 하여 어린이에게 채워 주면 경기(驚氣)나 사기(邪氣)를 모두 물리치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 처녀가 연못에 나와 날마다 물고기에게 먹이 주기를 몇 해째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물고기는 그녀가 한 남자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는 어부였는데 어느 날 물고기는 그녀가 연못가에 나와 읽는 편지를 삼켜버리고는 어부 총각의 그물에 일부러 걸립니다. 어부는 이 물고기를 요리하려고 배를 가르니 그 속에서 처녀의 편지가 나와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로 이 설화는 강릉지방의 양어못 설화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민담에는 물고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예부터 물고기는 ‘보은’의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물고기는 고사를 지내거나 굿을 할 때 쓰였는데 북어가 그것입니다. 고사 지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루떡과 북어이며 떡은 고사 뒤에 나눠먹지만 북어는 광목이나 흰 실에 묶어 문이나 벽에 걸어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물고기는 악귀를 쫓거나 재액(災厄)을 막기 위한 것이지요. 물고기를 제물로 쓰는 것은 어촌 지역이 두드러지는데 배를 만들어 처음 띄울 때는 반드시 뱃고사를 지냈지요. 이때의 제물은 명태를 비롯한 해산물과 떡과 술이 쓰이는데 고기잡이에서 잡은 크고 좋은 녀석은 배안에 마련한 배서낭(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에구 돈 찾었어유. 장독대 앞에 접힌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며 다행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차에 있지도 않은 돈을 그래 차에 빠졌다며 또 주었느냐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일부러 받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아녀유 진짜 차에 빠진 거유~ 하니 아주머니가 깔깔 웃으며 그 차는 돈이 새끼를 치는 찬가? 진짜 장독대 앞에 떨어진 거 찾았어유. 하시며 또다시 한 번 더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인삼농사 농부 이종옥 씨가 쓴 《농부일기(창조문학사)》, 라는 수필집에 나오는 대목이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인부를 구해 데리고 오는 아주머니가 일당으로 받은 3만원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이종옥 씨는 아주머니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받은 돈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가슴 아플까 하여 거짓으로 차에서 3만원 봉투를 찾았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자신의 장독대에서 3만원을 찾았다고 해서 벌어진 일을 쓴 것이다. 그야말로 농촌 인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경이다. 그는 충북 괴산에서 농사꾼으로만 살아왔다. 처음엔 고추농사도 짓고 소도 키웠지만 지금은 인삼농사만 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안 보이는 곳에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이는 것이 일식주택의 특징 입니다. 천장 판 위에 훌륭한 대들보가 그대로 들어나 있는데 이것을 의식해서 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물론 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런 의식을 안할 겁니다만... 이 말은 어제 30일 인천관동갤러리(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 31번길 38) 개관식에 이은 첫 전시회인 인천 일식주택 재생프로젝트 과정을 설명한 도미이마사노리 (66살, 富井正憲,한양대 건축학과)교수의 말이다. ▲ 인사말을 하는 도다이코쿠 관장(왼쪽)과 남편 류은규 사진작가 이날 갤러리 개관을 축하해주러 온 관람객들은 그다지 넓지 않은 갤러리 1층을 가득메웠다.입추의 여지 없이 모인80여명은 앞으로 인천의 명소가 될 미술관 개관식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개관 기념식은 관장인 도다이쿠코 씨의 인사에 이어 한양대건축학과 이하리, 심단우 학생의 인천 일식 주택 재생프로젝트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 일식주택 리노베이션에 참여한 한양대 건축학과 이하리 양과 심단우 군의 발표 ▲ 일식주택 프로젝트에 참여한학생이 개선된 일식주택 모형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도미이마사노리 교수의 바다를 건너 온 일식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내낀 봉우리 우뚝하고 물은 늠실거리는데 거울 속 민가는 푸른 봉우리와 마주 했네 외로운 돛단배는 바람 싣고 어디로 가는가 별안간 새의 자취 아득하구나 이는 최치원의 ‘황산강 임경대’를 읊은 노래로 여기에 나오는 ‘거울’은 맑은 물을 일컫고 있습니다. 사물을 비추는 것은 꼭 거울이 아니더라도 가능하지만 실물인 거울이 나타난 것은 그 뿌리를 청동기 시대에 두고 있습니다. 그 옛날 동경(銅鏡), 석경(石鏡), 은경(銀鏡) 따위는 통치자의 상징으로 쓰였지요. 고려 공민왕 때 이성계에게 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주고 맞히도록 한 것도 실은 하늘이 이성계의 뛰어난 무술을 보이게 하여 낡은 고려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통치자를 세우기 위한다는 속사정이 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삼국사기》 열전에 보면 설녀와 가실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라 진평왕 때 설녀의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병역을 치른 가실이는 오랜 뒤에야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고생을 해서 그만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지요. 그때 설녀와 가실이는 헤어지면서 나누어 가졌던 반쪽 거울을 맞추어 보고 혼인을 하게 되는 것처럼 예전에는 거울이 신물(信物) 곧 남녀 사이의 사랑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동자상(童子像)은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불교의 청정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상입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각각 화현한 문수동자(文殊童子)와 보현동자(普賢童子), 그리고 명부(冥府)와 연관된 선악동자(善惡童子) 따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조선시대 17세기 이후 절의 명부전에서 시왕상의 좌우에 시자(侍子, 귀한 사람을 모시고 시중드는 사람) 모습으로 있는 선악동자상이지요. 흔히 동자상의 재료는 나무, 석고, 돌, 유리 따위로 만드는 데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모습이며 머리는 가운데 가리마를 두고 두 갈래로 길게 땋지요.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천도복숭아, 두루마리, 붓, 벼루, 봉황, 호랑이, 자라, 수박 따위의 물건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불교의 예배상 가운데 동자상은 특히 아름답고 천진무구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 왔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동자상은 삼국시대 백제 무령왕릉에서 쌍으로 나온 2.5㎝ 정도의 작은 유리로 만든 동자상입니다. ▲ 목아박물관의 "납석제동자입상"(조선시대) 고려시대의 대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 가는 화로에 숫불 /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기여 /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뒷 줄임) 이는 정지용 시인의 ‘석류’의 한 부분입니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홍보석에 견준다던지, 바알간 열매를 사랑하는 연인에 견주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당신의 겉 꽃은 / 옛날 신선의 술병같이 묘하고 예뿌오며 / 당신의 속 꽃은 / 하늘거리는 어린 아해의 양심 같이 밝으온데 / 그 속에는 광채 없는 황금가루가 소두룩하게 담겨 잇지오.” 이는 고희환 시인이 ‘석류꽃’을 노래한 시입니다. 이렇듯 석류는 열매와 꽃 모두 시인들이 즐겨 노래하던 과일로 제주 안무사 최해산이 한 꼭지에 6개가 달린 석류를 올렸다는 세종실록 (1435년 9월 21일) 기록처럼 우리 겨레가 오래 전부터 먹어 온 과일입니다. 석류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갱년기 여성에게 특히 좋으며 비타민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임금이 신하에게 관직·관작·자격·시호·토지·노비 따위를 내려주는 문서를 교지(敎旨)라 합니다. 그러나 그 교지도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가 있었습니다. 관료에게 관작·관직을 내리는 교지는 고신(告身 : 사령장),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교지는 홍패(紅牌),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리는 교지는 백패(白牌), 죽은 사람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교지는 추증교지(追贈敎旨)였지요. 이밖에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는 노비토전사패(奴婢土田賜牌)도 있고, 향리에게 구역을 면제하는 교지는 향리면역사패라고 하며, 죽은 신하에게 시호를 내려줄 때도 교지를 썼습니다. 현대사회에서의 임명장과 같은 이 문서는 고려시대에는 제서(制書)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 또는 관교(官敎), 대한제국 때에는 칙명(勅命)이라고 다르게 불렀습니다. ▲ 천민 김대인이 벼슬을 받은 교지(국립해양박물관) 그런데 양반만 받을 수 있었던 교지를 천민이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김대인은 천민 출신으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가 중년에 다시 속세로 돌아와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에게 기개를 인정받아 그 아래에 들어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하늘은 이불이요 대지는 자리로다 / 태산을 베개하고 구름을 병풍 삼네 / 저 달은 촛불이요 바다는 큰 술잔 / 얼큰히 대취하여 자리 털고 일어나 / 어깨춤 덩실덩실 추려고 하다말다 / 행여나 장삼자락 곤륜산에 걸릴레라” 이는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난 법력의 진묵대사 선시(禪詩)입니다. 진묵대사는 석가모니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 받을 정도로 법력(法力)이 출중하였으며, 술에 관한 기행이나 설화도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스님으로 진묵대사가 수왕사에서 빚어 마시던 비법의 술 “송화백일주”는 400년 법손인 수왕사 주지 벽암 스님이 이어받아 빚고 있습니다. 벽암스님은 열두 살에 출가해 열일곱 살부터 수왕사에 머물면서 술을 담가 온 지 30년 만인 1994년 송화백일주 양조법으로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1호에 지정된 이래 1998년 민속주품평회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대통령의 설 명절 선물로 뽑히는 등 그 신비한 술맛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송화백일주는 조선시대 장계향의《음식디미방(1679)》과 최한기의 《농정회요(1830)》와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도 나오는 유래가 깊은 술입니다. 스님이 술을 빚는다고 하면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