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무예(武藝)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무인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다루지 않더라도 상대방과 몸을 통한 다툼이라면 모두 무예일 것입니다. 이 무예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호신과 함께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필살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통의 무예와는 다른 한국 고유의 무예 택견도 있지요. 여러 문헌에는 손으로 친다는 뜻의 수박(手搏)·수박희(手搏戱) 같은 한자말로 표기되어 있고 ≪국어사전≫에는 우리말 “태껸”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발로 차서 쓰러뜨리는 경기라 하여 각희(脚戱)라고도 합니다. ▲ 유숙(劉淑)의 대쾌도(大快圖), 서울대학교박물관그림 아래에 태견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려사≫에는 “이의민(李義旼)은 수박을 잘하여 의종이 그를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 “장사들에게 수박희를 시켜서 이긴 자에게는 상으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왕이 상춘정(賞春亭)에 나가 수박희를 구경했다.”처럼 수박 또는 수박희라는 말이 자주 보입니다. 이렇게 고려에서는 택견이 무관의 승진기준이 될 만큼 중요한 무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택견은 외유내강의 무예로 그 동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2015 을미년 양띠 해를 맞이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12지신 가운데 하나인 양을 우리 문화에서는 어떻게 보았을까? 양의 모든 것을 담은 행복을 부르는 양 전시회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오는 2월 23일까지 열리고 있어 다녀 왔다. 양들이 푸른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만큼 평화스러운 정경도 없다. 정말 양은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일까? ▲ 전시장 들어가면 양이 동산에서 평화롭게 노는 그림이 보인다. ▲ 양과 염소의 구분 그림, 위 두줄은 양이고 아래는 염소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먼저 양이 평화롭게 노는 모습의 그림이 걸려 있고, 양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가장 궁금한 것은 양띠를 말하는 것이 면양인지, 염소인지다. 정확한 문헌 근거는 없지만 염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1527년(중종 22)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따르면 양(羊)은 중국에서 들어온 호양(胡羊)과 면양(棉羊)으로, 염소는 산양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호양과 면양은 우리나라에서 키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12지신의 양은 염소로 보는 게 타당하다. 대한제국의 큰 나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건축물에는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법이 도입되었는데, 흘림, 귀솟음, 안쏠림 따위가 그것입니다. 먼저 흘림을 보면 기둥의 굵기를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조금씩 달라지게 하는 것인데 민흘림과 배흘림이 있습니다. 민흘림은 기둥의 위쪽이 아래쪽보다 작게 마름된 기둥으로, 둥근기둥에 주로 사용하는데, 해인사 응진전, 화엄사 각황전 따위가 그 예지요. 배흘림기둥은 흔히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의 기둥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데,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나 아래 에서 3/1 지점이 다른 부분보다 볼록하게 배불려 있는 기둥입니다. 배흘림도 주로 원통형 기둥에 쓰는 것으로 이 배흘림 기법은 기둥을 아래 위를 같은 굵기로 하였을 때, 기둥의 중간 부분이 윗부분이나 아래보다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해 주는 효과를 거둔다고 하지요. ▲ 민흘림 기둥(왼쪽), 배흘림 기둥 배흘림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도 보이는데 이를 엔타시스(entasis)라 하며, 그래서 우리의 배흘림 기법이 엔타시스의 영향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배흘림 기법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할 만큼 우리나라도 오래 전부터 써왔기에 꼭 그렇게 만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넷째 절기로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大寒)인데 세 끼 가운데 한 끼는 꼭 죽을 먹었지요. 소한 지나 대한이 한 해 가운데 가장 춥다고 하지만 이는 중국 화북지방의 기준이어서 우리나라와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지요. ▲ 추운 겨울엔 뜨거운 국물과 함께 어묵을 먹는 것이 제격이다.젊은 여성들이 어묵으로 추위를 녹일 때 밖에선 나무가 눈을 껴안고 떨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대한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까지 약 일주간을 신구간(新舊間)이라 하여, 이사나 집수리를 비롯하여 집안 손질과 행사를 해도 큰 탈이 없다고 믿습니다. 이때는 땅에 내려와 있던 신들이 하늘에 올라가 새로운 일을 받아오는 기간이기 때문에 땅에는 신들이 없기에 평소에 금기처럼 여기던 일들을 해도 아무 탈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에는 이사 하는 것은 물론은 부엌, 문, 변소, 외양간고치기, 집 뜯어 고치기, ·울타리 안에서의 흙 파는 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춤을 크게 나누면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와 민속춤으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 곧 음직이는듯 멈추고 멈춘 듯 움직이는 것이 그 깊은 세계입니다. 우리 춤은 흥겨움에 빠져들어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다가 신명이 정점에 다다르면 자신도 모르는 무아지경에 빠져 한 순간 멈춥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다시 격렬한 움직임의 세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춤이 그렇게 정중동과 동중정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춤동작의 형태와 형태가 이어지는 춤이 아니라 선과 선이 연결되는 춤인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정중동은 ‘겉으로는 숨 막힐 듯 조용한 가운데 속으로는 부단한 움직임’이 이어지며, 동중정은 ‘겉으로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멈춤에서도 움직임에서도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 그 춤의 세계를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의 어떤 춤 세계와도 달리 격렬한 춤세계만 있거나 교태가 객석의 눈을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 ▲ 정중동(靜中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살풀이, 승무, 태평무(왼쪽부터) 특히 무대예술로 승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금 창녕하면 우포늪이 유명하지만 1927년 10월 14일치 동아일보의 <경남 1위, 창녕>에 보면 ‘우포늪’은 없고 화앙산 일대의 유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창녕읍내 주산인 화앙산 서쪽 송현(松峴)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미륵상이 있는데 높이가 4척 6촌 (139cm)으로 경주 석굴암불상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360여 년 전 것으로 여겨지는 신라 진흥왕 22년에 강역(疆域) 개척 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척경비석(拓境碑石)이 있는데 이는 북한산과 함경도에 세운 비석과 때를 같이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 ▲ 동아일보 1927년 10월 14일 창녕 탐방기가 이 밖에도 화앙산성, 영산산성, 태자봉, 보림사와 같은 명승지와 함께 경남 창녕군 영산면 원다리길에 있는 만년교(萬年橋)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다리는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는데 물에 비친 아름다운 다리는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다리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위는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순국 직전 남긴 절명시입니다. 황현은 그의 동생 황원(黃瑗)에게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라 하여 이미 자신이 순국을 결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고 합니다. ▲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1848~194년)이 그린 매천 황현(黃玹,1855~1910) 초상화 그런 황현 지사를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1848~194년)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채용신은 특히 인물을 잘 그려 황현상 말고도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긴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황현상’은 극세필(極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경북 김천시 구성면에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가례증해(家禮增解)》 목판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목판본은 정조 16년(1792) 직지사에서 느티나무를 이용하여 김풍해 등이 3년의 작업에 걸쳐 정조 18년(1794)에 완성한 목판으로 모두 475장으로 새김 기술이 뛰어나고 보존이 잘되어 가례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 목판의 내용은 이의조(李宜朝) 선생이 관혼상제의 예법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기존에 있던 《주자가례》에 우리나라의 여러 설(說)을 열거, 증보, 해석하고, 자기의 자기의 생각을 덧붙여 영조 47년(1771) 완성한 《가례증해초본》입니다. 이 책은 이의조 선생이 가학(家學)으로 물려받았던 가례의 학문적인 연구성과와 이재(李縡)로부터 전수된 예학의 계통을 바탕으로 하여 이룩한 수준 높은 《가례》의 해설서로 알려져 있지요.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가례증해(家禮增解)》 목판본 “참봉(參奉) 이의조는 책을 읽고 도덕을 강론하며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지은 《가례증해(家禮增解)》는 《예경(禮經)》을 보충하였는데, 그 깊은 학문과 포부에도 단지 미관말직에 그쳤으므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태종실록》 17년(1417) 6월 12일 기록에 보면 “길창균 권규에게 약주와 건록·전복 등을 내려주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조선후기 궁중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 기록에는 궁중음식 대부분의 탕, 찜에는 다른 고기류와 함께 전복이 꼭 들어가며 전복을 주재료로 하는 음식에는 추복탕, 전복초, 전복느름적, 생복화양적, 생복찜, 전복숙, 생복회, 전복쌈 등이 있다고 되어 있을 정도로 전복은 귀한 궁중 음식이었지요. 따라서 전복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궁중 진상품으로는 해물 가운데 가장 맛있으면서도 채취하기 어려운 품목으로 정해진 수량을 보내는 것도 백성들에겐 매우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해산물들 특히 생복찜과 생복회 따위로 요리하는 전복은 궁과 가까운 지역인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등에서는 생물들을 받을 수 있지만, 먼 곳인 전라도와 함경도, 경상도와 제주에서는 상할 염려가 있기에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조선시대 궁궐에서 자양강장제로 즐겨 먹었던 전복 그런데 궁궐에서 이렇게 전복을 좋아했던 까닭은 전복이 눈의 피로 회복에 매우 좋은 것은 물론 아르기닌이라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 가운데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머리쓰개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쓰임새로 바뀌었습니다. 갓은 넓은 의미로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과 그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흑립·칠립·평립이라고 부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은 그 갓을 만드는 과정을 일컫습니다. ▲ "갓일" 가운데 입자, 양태, 총모자(왼쪽부터) 하는 모습의 인형(갓전시관) 그런데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뉩니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우뚝 솟은 원통 모양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얽어내 챙을 만드는 과정을 말하며, 입자는 이들 총모자와 양태를 결합하여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일을 일컫습니다.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고 무형문화재 보유자도 분명히 구분이 되어 있지요. 우리 겨레의 의생활에서 필수품목이었던 갓은 단발령 이후 한복 대신 서양옷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