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익(李瀷)은 기생이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인데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습니다.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이들이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고 하지요. 뒤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 ▲ 김준근의 <기생 검무 추고> 조선 말기에 이르면 이 기생이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게 되는데 이 가운데 일패 기생은 관기(官妓)를 두루 일컫는 것으로 예의범절에 밝고 몸을 내맡기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전통가무의 보존자이며 전승자로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패 기생은 은근짜라고 불리며 밀매음녀에 가까웠으며 삼패 기생은 몸을 파는 매춘부로 나뉩니다. 그러나 이 기생들은 나라와 겨레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신분을 떠나 애국충정을 펼쳤던 의기(義妓)가 많았지요.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기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떨어진 진주 기생 논개(論介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요즘은 오리털로 된 두꺼운 점퍼를 입기에 웬만한 추위에는 끄떡없습니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추위를 견뎠을 까요? 그 대표적인 옷이 바로 누비옷입니다. 누비란 말은 승복(僧服)인 납의(衲衣)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납’은 기웠다는 뜻이지요.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한 당시부터 불제자들은 고행의 한 수련법으로 세상 사람들이 내버린 여러 가지 낡은 헝겊을 모아서 누덕누덕 기워 만든 납의라는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납의처럼 기운 흔적을 살린 옷을 해 입게 되고 그것을 납의라고 하다가 누비옷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누비 간격에 따라 안감과 겉감 사이에 넣는 솜의 양을 달리하고 세로선으로 누벼주면 입체적인 세로의 누비선이 생기지요. 누비는 원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한의 기능과 옷감을 오래가게 하는 등 실용적인 목적이 담긴 옷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옷감이나 기법이 다양해지면서 요즘은 장식성이 뛰어난 각종 주머니, 보자기 등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선희 교수 작품 누비는 솜의 유무, 누벼진 형태, 누비간격 등에 따라 그 종류가 나뉩니다. 먼저 솜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신륵사 동대에 푸르른 잣나무숲 / 神勒東臺翠柏森 예성으로 갈 배가 이 숲에 머물렀네 / 蘂城歸棹滯林 나옹의 부도탑은 풍경이 말해주고 / 懶翁塔風鈴語 목로가 쓴 빗돌엔 바위옷이 끼어있다 / 牧老碑荒石髮侵 적석의 개인 구름 날빛이 훤하건만 / 赤石晴雲浮日色 여강 멀리 있는 나무 봄을 맞아 음음하네 / 驪江遠樹入春陰 왜 더디 가느냐고 사람들아 묻지 말게 / 傍人莫問遲徊意 끝도 없는 연파가 이 마음에 들어서야 / 無限煙波此心 ▲ 낙산사 풍경 이는 다산 정약용의 시로 “신륵사 동대에 오르다(登神勒寺東臺)”입니다. 《다산시문집》 제3권에 나오는 이 시에는 풍경을 풍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절집 처마 끝에 달려 있는 불구(佛具)의 하나인 풍경(風磬)은 ‘풍령(風鈴) 또는 풍탁(風鐸)’이라고도 부르며 예술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정경으로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풍경은 한자 뜻 그대로 바람이 내는 소리입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때론 은은하게 때론 크게 나기도 하지요. 그래서 풍경은 경세(警世)의 뜻을 지닌 도구로서, 수행자의 나태함이나 소홀함을 깨우치는 도구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풍경의 모습도 그것을 뒷받침 해주지요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인데 해가 양력으로 바뀌고 처음 나타난다. 소한 무렵은 정초한파(正初寒波)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때이다. 이름으로만 봐서는 작은 추위라는 뜻이지만 실제 보름 뒤에 오는 대한보다 더 추울 때가 많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농가에서는 소한부터 날이 풀리는 입춘 전까지 약 한 달 간 혹한(酷寒)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둔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에서는 문밖 나들이가 어려우므로 땔감과 먹을거리를 집안에 충분히 비치해 두었다. ▲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특히 동지부터 입춘까지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벽에 붙이고 날마다 매화 한 송이를 그려나가면서 봄을 기다렸다. 지금에 견주면 난방이 시원찮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누비옷을 입고 방안에 화로를 두는 정도였을 겨울나기에 “구구소한도”라는 것이 한몫을 한 것이다. 이 구구소한도는 동지가 되면 종이에 9개의 칸을 그려놓고 한 칸에 9개씩 81개의 매화를 그린 다음 하루에 하나씩 매화에 붉은빛을 칠해나가게 한 것을 이른다. 그런데 붉은빛을 칠해가는 방법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양띠 해를 맞아 온 나라에 양(羊)자가 들어가는 땅이름을 조사해보니 양과 관련된 곳이 40곳이나 있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150만개 땅이름 가운데 40곳이 양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마을이 23곳, 섬 7곳, 산 6곳으로 백양동, 양장, 양도, 양각산, 양동 따위로 전남이 15곳, 경남이 8곳이며, 경기, 경북에도 있습니다. 땅이름 말고 절 이름 가운데 백양사도 양자가 들어가는 곳이지요. 전북 순창과 정읍, 전남 장성에 걸쳐 있는 백암산의 '백양사'는 창건 당시에는 백암사로 불렀습니다. 그 뒤 '정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훗날 조선 선조 7년 환양선사가 금강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흰 양이 설법을 듣고 갔다고 해서 백양사(白羊寺)라 이름을 고쳐 불렸다지요. ▲ <양정(羊鼎), 국립고궁박물관>, 왕실 제사 떼 삶은 양을 담았던 솥 모양의 제기. 양의 아래부분에는 양머리 모양의 다리가 솥을 받친다. 양은 속죄양(贖罪羊)이란 말이 있듯이 언제나 희생의 상징입니다. 서양에서 사람을 벌하는 대신 희생물로 바쳐졌으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도 제사용으로 쓰인 것이지요. 양은 또한 반드시 가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올해 들어 2,500원 하던 담뱃값이 4,500원으로 껑충 뛰어오르면서 담배를 끊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아직 외국산 담뱃값은 오르지 않았으나 그것도 시간문제일뿐더러 이제 소규모 음식점까지 담배 피우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 담배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광해군 8년(1612) 무렵입니다. 처음엔 쓴 담배가 별로 인기 없었는데 많은 사람이 피우게 된 데는 사람을 만났을 때 술 대신에 우월감으로 담배를 권했고, 이를 신비롭게 본 사람들이 연기차 또는 연기술이라고 한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들어왔을 때는 담배가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돕는다고 알려져 치료제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남쪽에서 들어온 신령한 풀이라는 뜻으로 남영초(南靈草)라고 불렀다가 오히려 담배가 간의 기운을 해쳐 눈을 어둡게 한다고 하여 담배를 끊으려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자 “요망한 풀”이라고 했지요. ▲ 담배를 연기차라고도 하고 요망한 풀이라고도 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런데 담배가 인기를 얻자 이를 청나라 심양에 수출하려고까지하지만, 상인이 담배를 가지고 국경을 넘다가 청나라 세관원에게 밀수 혐의로 체포되었고, 청나라 정부가 조선에 항의하면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전 9시 22분 임진각. 화환을 목에 건 황소 옆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한 마리의 소가 1000 마리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1998년 6월 16일 언론은 이렇게 83살의 정주영 회장이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이후 10여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지난 5월 9일 나는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연재를 이렇게 시작했다. 정주영, 그는 실향민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17살 때 현재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했는데 그의 나이 83살이 되던 1998년 6월 16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하게 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소떼 방북을 위해 이미 1992년부터 자신의 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지난 섣달 그믐날 혹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밤새워 즐기신 분이 있으신가요? 밤 새워 놀면 다음 날은 지쳐서 쓰러지게 마련이죠. 그런데 고려에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밤새 노는 일을 꼭 두 달에 한번 씩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려 사람들은 한 해에 6번이나 밤새는 일 곧 경신수야(庚申守夜)를 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밤을 새웠던 그 날은 경신일(庚申日)이었기에 경신 날 밤을 지킨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고려 사람들은 당시 도교의 생각으로 사람들의 몸속에 형체가 없는 삼시충(三尸蟲)이란 놈이 살았는데 두 달에 한 번씩 사람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빠져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선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에게 올라가 자신의 주인이 두 달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낱낱이 일러 바칩니다. 그러면 옥황상제는 죄질에 따라 벌을 주는데 그 벌은 사람의 수명을 줄이는 것이지요. ▲ 고려사람들, 삼시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밤새 춤추며 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삼시충이란 놈이 자기 몸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밤새워 술을 마시고 놀았던 것입니다. 도교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은 120살인데 죄를 많이 지으면 120살까지 살지 못하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 기증유물전시실에서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기증특별전 서울의 솜씨, 서울의 장인전을 오는 2월 22일까지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시울시 무형문화재 기능분야 29인(생존 23인, 명예 2, 작고 4인)의 작품을 기증받아 마련된 전시회다. 서울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의 작품은 어떤 아름다움과 솜씨를 드러내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 경회루 단합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6호 초고장(草藁匠) 한순자 ▲ 당의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1호 박광훈 ▲ 용봉녀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17호 은공장 이전훈 ▲ 옥투각삼봉술노리개(위), 궁수낭, 어깨주머니, 진주낭(왼쪽부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 마미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9호 체메우기장 고 최성철 ▲ 남태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남태칠장 정병호 ▲ 민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 김만희 ▲ 붓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5호 붓장 고 권영진 ▲ 각궁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 권무석 ▲ 나전운화문대반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전장 정명채(왼쪽), 나전장 원반 서울시 무형문화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오늘은 을미년 새해입니다. 새해 첫날부터 우리 [쓴소리단소리]가 꾸지람을 하는 기사로 시작할 수는 없겠지요. 더구나 쓴소리는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니그저 오늘은 지난해 큰 친찬을 받았던 멋진 우리말 광고 잔치를 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대학광고로 인덕대학은 인덕 앓이와 기댈 언덕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어 광고에 혈안이 된 다른 대학들에 견주면 우리말 사랑이 참 돋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참과 끼니 그리고 그냥 밥집은 참 정겹습니다. 한자말이나 외국어 한 자 없이 온통 우리말 사랑으로 소박하게 채운 것이지요. 식당이나, 레스토랑, 가든을 쓰지 않고 우리말로 간판을 다는 식당 주인은 분명 애국자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주 배영초등학교와 금곡초등학교는 펼침막으로 열매 나누는 잔치라 했습니다. 그리고 경축 대신에 기쁨과 손뼉입니다. 정말 멋진 펼침막입니다. 또 영어자랑에 신이 난 롯데백화점에 견주면 애경백화점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만 쓰는 광고도 칭찬해야만 합니다. 그밖에 대웅전 대신 큰 법당이라 쓴 경기도 운악산 봉선사, 시민청 귀 빠진 날이라 쓴 서울특별시도 참 모범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