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둘째 동지(冬至)로 한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길다는 날입니다. 옛 사람들은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습니다. 이날부터 낮이 길어진다는 곧 해가 부활한다는 큰 뜻을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르지요. 특히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하는데 올해는 초순인 음력 11월 1일에 들었기에 애동지가 되는 것입니다. 애동지 때는 아이들에게 나쁘다 하여 팥죽을 쑤지 않고 대신 팥시루떡을 해먹었지요. 팥죽이나 팥시루떡은 붉은 색으로 악귀를 좇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동지의 세세풍속들 / 동자헌말, 팥죽나누기, 달력 선물하기(왼쪽부터) 동지 때의 세시풍속으로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 바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해보기나 했어포기 모르는 뚝심 포드와 車 조립 기술 계약 맺어 어려운 과제 주고 해결책도 귀띔 현대자동차 일본판매 사장을 지냈던 김진수 씨는 재미있는 경험담을 들려준다. 현대상사 일본지점장을 할 때의 이야기다. 정주영은 그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일본 지점장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일본에 배를 팔아야지. 회장님 일본은 해상왕국인데다 조선왕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에 배를 판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팔아보기나 했어? 김진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주영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니 그저 겁도 없이 말대꾸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아보기나 했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사실 팔아보지 않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고 했다. 정 회장의 팔아봤어?란 말은 그에게 일생 큰 가르침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뒤로부터 정주영을 회사의 회장이나 인생 선배가 아니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주영이 아우 인영에게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고 들어오라는 갑작스런 명령을 했을 때 정인영은 형의 성격에 이력이 났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활대로 날카롭게 슬픔을 그어버리고 농현으로 절망의 굳어버린 마음을 달래며 그 누구보다 음악 안에서 자유로운 영혼임을 증명하리. 아! 한국 민속악의 영혼 백인영 용인대학교 국악과 한진 교수는 백인영 명인을 그렇게 노래했다. 갑오년이 저물어가는 12월 한 겨울밤. 쌓인 그리고 흩날리는 눈 속에서 사람들은 국립국악원 우면당으로 우면당으로 모여들었다. 세상과 하직한 지 어언 두해를 맞은 예봉 백인영 명인의 부활을 보고 싶어서였다. ▲ 유대봉제 백인영류 입체산조 백인영 명인이 어떤 이였던가? 가야금의 명인이면서 아쟁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연주자였다. 뛰어난 음악성을 밑바탕으로 죽은 음악이 아닌 숨 쉬는 음악, 관객과 교감하는 음악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그야말로 명인 중의 명인이 아니었던가? 늘 스승에게서 받은 연주를 똑같이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농익은 실력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연주는 청중을 꼼짝 못하게 했던 명인이었다. 그가 간지 벌써 두해, 그러나 제자들과 명인의 팬들은 아직도 그를 놔 드릴 수 없다. 공연은 먼저 유대봉제 백인영류 입체산조로 시작한다. 산조는 원래 굳은 음악이 아닌 살아 있는 음악이라 했던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汗蒸所)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가끔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알아보아, 과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없앨 것이요, 만일 병 치료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 ▲ 한국인들에게 인기인 찜질방, 조선시대엔 치료소였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는 《세종실록》 4년(1422) 8월 25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한증소(汗蒸所)”란 오늘날의 찜질방과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되지요. 한증소에는 스님들이 환자들을 돌보며 땀을 빼서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때 땀을 빼며 치료하는 사람 가운데 죽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어서 한증소를 없앨 것인지 아니면 그냥 둘 것인지를 의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종이 하교한 것을 보면 한증소 자체의 효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병자의 증상을 살펴 땀을 뺄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가려 적절히 치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조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예나 지금이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수군이 호랑이 사냥을 다닌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겠지요. 그런 비슷한 일이 숙종 때 벌어졌습니다. 숙종은 비교적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재위 40년이 되자 자꾸 몸이 붓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부기에는 물오리가 좋다고 하였고, 이에 각 도의 감사들은 군인들을 풀어 물오리 잡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물오리를 잡아 임금에게 상납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놈의 물오리는 날짐승이어서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군인들은 고생만 했지 물오리는 제대로 잡을 수 없었고, 오히려 군인들의 원성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지요. 이때 병조판서가 “군인들은 한가한 틈이 많습니다. 그들을 동원해 물오리를 잡는 것이 그리 무리한 일은 아닙니다. 전하의 옥체가 걱정이오니 그대로 군인들을 시켜 물오리를 잡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 사진, 최우성 기자 이에 숙종은 “군인들이란 물놀이를 시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두는 나라의 기둥이다. 기둥을 뽑아 헛된 데 쓰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또 예기(禮記)에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이며, 공주아리랑보존회장인 남은혜 명창이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제정 제10회 아리랑상 활동상을 오는 12월 22일(월요일) 늦은 1시 30분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 대회의실에서 받는다. 남은혜 명창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동포사회 여행을 통해 그 역사와 삶을 밀착시킨 북간도아리랑과 치르치크아리랑을 주체화 하여 불러 큰 손뼉을 받았다. 특히 검둥이 팔아 길 떠나네 / 북간도는 좋은 곳 이 밥 먹는 곳 / 나무도 하지 않고 학교도 간다네 / 이렇게 좋은 곳을 찾아 가는데 / 아버지 어머니 짐 싸면서 / 북간도 좋다드니 왜 우는가라는 가사의 북간도 아리랑 속 한은 남은혜 명창만이 부를 수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활동상을 받는 남은헤 명창의 그동안 활동상황을 보면 북간도아리랑(중국동포사회)과 치르치크아리랑(고려인동포사회)을 창작, 헌사한 것은 물론 2012~2013년 북간도와 러시아 고려인사회 방문, 동포 삶을 반영한 아리랑을 불렀다. 또 남 명창은 애머더 3월 1일 13번의 공주아리랑제를 열었고, 2013년 경복궁아리랑한마당, 인천 장애자아시안게임 공연, 렉쳐 공주아리랑 콘서트(201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대소 신민의 가옥이 정한 제도가 없어, 이로 말미암아 서민의 가옥과 공경의 주택은 참람히 궁궐과도 같아서, 서로 다투어 사치와 화미(華美)를 숭상하고 있다 (중간 줄임)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간(間)으로 하고, 대군(大君)은 이에 10간을 더하며,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으로 하고,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할 지며,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숙석(熟石, 인공으로 다듬은 돌)을 쓰지 말 것이다. 또한 화공(花拱, 기둥 위에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짜올린 꽃무늬 구조)과 진채(眞彩, 진한 빛깔)·단청(丹靑)을 쓰지 말고 되도록 검소·간략한 기풍을 숭상하되, 사당(祠堂)이나, 부모가 물려준 가옥이나, 사들인 가옥, 외방에 세운 가옥은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 궁궐 천정용 단청 이는 세종 13년(1431) 1월 12일 기록으로 집을 지을 때 단청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단청(丹靑)이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무늬와 그림을 그려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러한 단청을 하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단청장이라고 하는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동구를 들어서니 마현고개에 / 馬峴當洞口 연석이 백 경이나 깔려 있고 / 鍊石鋪百頃 일로가 평탄하기 숫돌 같은데 / 一路坦如砥 다리에 들어서니 깊고 고요한 물 / 入橋水深靜 저녁녘에 이르니 대 법주사 / 到大法住황 홀히 선경에나 들어온 듯 / 況然入異境 철확(무쇠솥)이 계곡 옆에 가로질렸고 / 鐵側溪谷 동주가 여기저기 번쩍이는데 / 銅柱光景 나대의 전상이 그대로 있어 / 羅代殿像在 귀신인 듯 괴물인 듯 무시무시했네 / 鬼怪伏精猛 위는 <동문선> 제3권에 채수(蔡壽)가 지은 “속리산기행증욱상인(遊俗離山記行贈旭上人)”이란 시의 일부입니다. 동문선은 삼국시대 후반기로부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근세조선의 중종(中宗) 초 무렵까지 시인ㆍ문사들의 수많은 작품을 뽑아 펴낸 책입니다. 정편, 속편으로 구성되었고 정편은 성종(成宗) 9년(1478년) 12월에 서거정 등이 모아 엮었으며, 133권으로 되어 있지요. 한편 속편은 중종(中宗) 13년 7월(1518년)에 신용개(申用漑) 등이 찬집한 것으로 총 23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 3천명의 밥을 지을 수 있다는 법주사 무쇠솥(보물 재1413호) 속리산 법주사 무쇠솥을 시에 실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통행금지” 하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광복을 맞으면서 시작된 통행금지가 1982년 1월까지 시민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지요. 광복 직후엔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1961년부터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통금시간이었습니다. 동무들하고 신나게 놀다가도 통금시간이 다가오면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었지요. 어떤 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꾀를 낸다는 것이 장승처럼 멀뚱히 서 있다 여지없이 잡혀 파출소행을 했던 일도 있었구요. ▲ 순라꾼들이 들고다녔던 照足燈(국립온양민속박물관) 그런 통행금지가 물론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치안과 화재 예방을 위해 한성을 비롯해 주요 도시와 국경지방에까지 통행금지 시간을 두었지요. 시계라는 것이 없던 시절 성문이 닫히고 통금이 시작되는 때를 “인정(人定)”이라하며 28번의 종을 칩니다. 또한 통금이 풀리는 때를 파루(罷漏)라 하여 33번의 종을 쳐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인정을 친 이후는 지위가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통행금지를 위반하여 잡히면 엄한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 순라꾼은 발을 비춘다는 뜻의 조족등을 들고 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12‧12와 광주민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언론과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들었다. 주요기업 그룹 계열사 166개를 19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시책을 발표하고 밀어붙였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정주영이 아니었다.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라며 반발했다. 이에 당황한 경총 사무국 책임자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정 회장의 발언을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두환 '국보위'에 당당하게 맞서 업무 지시 전 꼼꼼하게 사전 준비 그뿐이 아니었다. 정주영이 국보위가 마련한 구조조정안에 반대하자 국보위측은 국책에 대항하느냐며 다그치자 이에 지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당당한 대응논리를 폈다. 나는 어떤 사업이든 땅을 준비하는 데서부터, 말뚝 박고 길 닦아서 그 위에 내 공장을 내가 지어서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그렇게 만든 사업체를 어려워서 넘겼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프리미엄을 받고 누구한테 넘겨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만든 것들은 하나하나 전부가 다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