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느 날 (세종이 수양대군에게)안평대군·임영대군과 더불어 가야금을 타라고 명하였는데, 세조는 배우지 않았으나 안평대군이 능히 따라가지 못하니 세종과 문종이 크게 웃었다. (중간 줄임)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추니 어린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 (세조 1권 총서 3번째 기사) ▲ 수양대군이 피리를 불자 학과 금성대군이 춤추었다.(그린 이무성 한국화가) 어린 임금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후세 사람들은 곱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으로 본다면 업적도 적지 않았지요. 세조는 훈민정음이 자리를 잡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또 예능에 다양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 《세조실록》 1권 총서의 내용을 보면 원래 세조 곧 수양대군이 악기를 좋아하지 않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수양대군이 무인들과 밤늦게 어울리다가 들어올 때 아버지 세종이 가야금 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동받은 수양대군은 다음날 아버지께 가야금을 배우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성의 옷에는 치마와 저고리가 있는데 저고리의 깃 따위를 회장(回裝)으로 꾸민 것을 회장저고리라고 합니다. 흔히 노랑이나 연두 바탕에 자줏빛이나 남빛 회장을 달아 꾸미지만 깃이나 끝동을 다른 천으로 대는 경우는 반회장저고리라고 하고 곁마기(겨드랑)를 더 대면 삼회장저고리라고 하지요. 이 회장저고리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고리가 1975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자상에 금을 입히다가 불상의 뱃속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저고리는 깃과 끝동, 섶과 옷고름 등에 짙은 배색을 한 회장저고리입니다. 저고리가 나온 불상은 세조임금이 1466년 상원사를 여러 차례 방문하던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이 저고리 또한 1460년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고리의 크기는 길이 52.4㎝, 품 34㎝이며, 전체적인 모습은 품이 넓어서 소매길이와 저고리길이가 짧게 보일 정도입니다. 깃은 네모로 각이 진 목판깃이며, 직선 형태의 소매와 짧고도 좁은 옷고름 등이 조선초기 저고리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저고리의 전체적인 구성은 균형이 잘 맞으며, 색상도 전통적인 쪽물을 들인 염색이 지금껏 곱게 남아있습니다. 이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빗돌[碑]란 어떤 일이나 그 자취를 뒷날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세워놓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대부분 돌비가 많은데 빗돌의 형태는 고구려 돌비인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년,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처럼 처음엔 돌기둥 모양들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와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비몸돌(碑身)과 거북 모양의 비받침(龜趺) 그리고 비머릿돌(首)을 갖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지요. 빗돌 부분 이름들을 보면 비몸돌 앞면은 비양(碑陽), 뒷면은 비음(碑陰)이라 했고, 비몸돌의 위 또는 비머릿돌의 가운데에 빗돌 이름을 새기는데 이를 제액(題額) 또는 전액(篆額)이라 불렀습니다. 빗돌 종류를 보면 내용에 따라 묘비(墓碑)탑비(塔碑)사묘비(祠廟碑, 신주나 영정을 모신 건물에 세운 비)사적비(事蹟碑, 어떤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유허비(遺墟碑,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는 비)·송덕비(頌德碑, 공덕을 기리는 비) 따위로 나뉩니다. 임금 무덤 앞에 세운 왕릉비(王陵碑), 절의 부도탑비(浮屠塔碑,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비), 임금이 국경을 돌아본 뒤에 세운 척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국악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큰 어른 가운데 한분인 벽파 이창배(1916~1983) 선생. 그는 경서도 소리의 중시조이자 경제시조창(京制時調唱: 서울, 경기 지방의 독특한 시조 창법. 박절이 엄정하고 속목을 쓰는 것이 특징)의 대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벽파는 경서도 소리의 예술적 위상뿐 아니라 학문적 위상까지 높인 인물로 평가됨은 물론, 현존하는 경서도 소리의 체계적 전승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 내로라하는 경서도 소리꾼 가운데 선생의 지도를 받지 않은 이가 없다 하니 선생이 어떤 분인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벽파 이창배 선생을 기리는 제1회 벽파대상 국악대제전 전국 국악경연(대회장 이상만황용주)이 벽파국악대전 추진위원회와 (사)선소리산타령연구보존회 주최, 대한민국 국회, 교육부, 서울특별시, 국립국악원, 성동구청 후원으로 지난 11월 23일 서울 성동구 소월아트홀서 열렸다. ▲ 경연대회 모습 ▲ 경연대회 모습 이날 황용주 대회장(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은 벽파 이창배 선생님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오늘날 우리 제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날로 몸과 맘이 쇠약해졌으니 본직과 겸대직을 속히 면하게 해 주소서.”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경석(1595-1671)이 67살의 나이로 현종임금(1662)에게 올린 상소문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상소문을 훑어보고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경석은 현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로 강원도 지방의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쓰는 등 정치 일선에서 대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1641년 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중국 심양에 함께 가지만 1년간 봉황성(鳳凰城)에 구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귀국한 뒤에는 대사헌·이조판서 따위를 거쳐 1649년(효종 즉위)에는 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김자점의 밀고로 조정의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져 효종이 추궁을 당하게 되자, 영의정인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 됩니다. 그 뒤 풀려나 영중추부사 등을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갑니다. 조선시대에는 70살이 넘는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杖]와 의자[궤]와 가마 따위를 내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 현종 9년 11월 임금이 이경석에게 내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1월 22일 토요일 저녁 5시 평택 북부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는 움Art 주최, 평택 거북놀이보존회 주관, 갈비성 후원으로 움Art 창단공연이 있었다. 움Art는 평택의 소리꾼 조정란, 조경하와 춤꾼 이현숙, 박미예가 함께 평택시민들에게 남도소리와 춤을 좀 더 가까이 보여드리기 위해 창단한 모임이다. 움Art는 말한다. 움은 새로움, 즐거움, 그리움입니다. 새로움의 공연, 즐거움의 공연, 그리움의 공연이고 싶습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 맛깔스러움, 멋스러움, 반가움을 담고 싶습니다. 움Art는 전통 국악공연, 창작공연, 무용공연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담아내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식전공연으로 동남풍의 문굿, 비나리를 선보였다. 움Art의 시작을 그렇게 비손하고 축원하는 것이다. 동남풍은 두드리면 열린다.는 소박한 믿음으로 한국의 장단에 몸을 실은 젊은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단체다. ▲ 식전공연 문굿, 비나리 - 동남풍 ▲ 한국무용 승무 - 이현숙 명무 ▲ 광대가 - 조경하 명창 이어서 무형문화재 호남산조춤 이수자 이현숙 명인의 승무가 펼쳐진다. 사뭇 멈춘 듯 이어지고 이어지는 듯 멈추는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76년 해가 저물던 무렵의 일이었다. 세계 최대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던 때였다. 우리는 지금 힘찬 도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재의 사정이 녹록하지는 않지만 위기는 또한 기회일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위기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똘똘 뭉쳐 헤쳐 나갑시다. 사람이 태어나 많은 일을 하다 죽지만 조국과 우리 겨레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정주영은 이렇게 현대 직원들에게 간곡하게 호소를 한 직후였다. 국가적으로도, 현대로서도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그들에게도, 나라에 있어서도 사느냐 죽느냐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 밤 환갑을 넘긴 62살의 정주영은 20살이나 어린 아들 뻘되는 김영덕 박사를 직접 만났다. 김영덕 박사는 현대건설과는 견줄 수도 없는 세계 최고의 석유회사 아람코에 재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해외 국적을 버리고 고국에 들어와서 현대건설과 함께 일해 주실 수 없나요? 주베일 산업항 공사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제 11월 22일 오후 3시 경기도 문화의전당 국악당에서 경기도문화의전당, 국악방송 후원으로 최근순의 명창의 서울경기의 긴소리 12좌창의 품격 공연이 있었다. 서울경기의 긴소리 곧 12좌창이란 한곡 한곡이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곡조들이다. 장단 역시, 단조롭게 반복되는 6박형 도드리장단이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장단과 즉흥성이 강조되는 다른 노래들보다는 훨씬 재미가 덜 하다. 그러나 창법은 매우 어렵고 다양한 목구성을 요하는 노래이고, 소리꾼의 음악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의 노래다. 그러기에 보통의 무대에서 소리꾼들은 이 12좌창을 외면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날 주인공인 최근순 명창은 10여 년 전 이미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서 12좌창의 완창무대를 가진바 있다. 그만큼 최근순 명창은 쉬운 소리가 아닌 진정한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소리꾼임을 말해준다. 공연의 처음은 최근순 명창과 80여 명 제자들의 12좌창 대표곡이라 할 유산가가 울려 퍼진다. 사계축 소리꾼 박춘경이 지은 노래로 12잡가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유장한 유산가이다. 최근순 명창과 80명의 소리꾼이 부른 이날 공연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로 첫눈이 내린다고 하는 “소설(小雪)”입니다. 소설은 말그대로 눈이 내리면서 추위가 시작되는데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부르지요. 소설은 양력 11월 하순에 드는데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많이 추워집니다. 또 이때는 음력 시월로 “`농공(農功)을 필(畢)`하는 달이다. 추수를 끝내고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는 달이다.“라 하여 ”상달“이라 했고,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어 ”공달“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 전에 김장을 하기 위해 서두르고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합니다.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하지요. 또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도 모아둡니다. ▲ 겨울나기 - 무청시래기, 무말랭이. 호박, 가지(왼쪽부터 시계방향) 한편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이즈음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대개 소설 무렵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졌으나 겁 많고 경계심이 강한 동물이 있습니다. 이 녀석은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해발 600~700m의 경사가 30~35도로 급한 험준한 바위의 산림지대에 주로 사는 데 산양이란 녀석입니다. 산양은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동물 I종의 하나로 몸길이 82~130cm, 꼬리길이 8~20cm, 체중 22~35kg으로 암수 모두 잘 발달한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몸 전체가 옅은 흑회색 또는 회갈색이며, 콧등에서 뒷머리를 거쳐 등허리와 꼬리 일부까지 이르는 부위는 짙은 검은 털이 나있지요. 그리고 목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턱밑에는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흰털이 나있고, 꼬리와 발굽 윗부분에도 흰털이 덮여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217호 산양은 비무장지대와 그 근처에 300여 마리, 양구군과 화천군 150여 마리, 울진-삼척-봉화군 및 설악산 지역에 각각 100여 마리가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밖에 오대산, 백운산, 지리산, 소백산, 태백산, 통고산, 백암산, 월악산 따위에도 살고 있다고 하지요. 원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산양은 높은 산악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었으나 무분별한 포획과 올무나 덫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