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청백리의 대표적인 조선의 선비를 꼽으라면 오리 대감 이원익(1547-1634)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40년 정승을 지낸 사람이 두어칸 띠집(초가)이 고작이었다는 게 이원익의 청빈을 잘 말해줍니다. 이원익은 또한 목에 힘주고 거들먹거리지 않은 관리로도 알려져 있는데 한번은 그가 안주 목사로 임명된 다음날 혼자 말을 타고 임지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 시대 지방관에 임명되면 바로 이튿날 홀로 임지로 출발하는 일은 흔치 않았으며 대개는 정부기관의 유력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신임 수령을 모시러 현지에서 아전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신임관은 그들과 함께 모양새 있게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지요. ▲ 오리 이원익, 포저 조익, 잠곡 김육(왼쪽부터) 낮은 관직에 있었던 젊은 관리 조익(1579-1655)도 백성을 끔찍하게 여긴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엄청난 책을 읽었으면서도 늘 읽은 글이 적어서 듣고 본 것이 고루하고 지식이 어둡다고 겸손해 합니다. 그러한 탐구적인 자세였기에 사교적이지 않아 승진도 남보다 느렸습니다. 그는 평안도 평사라는 관리로 내려가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리는 것을 보고 《제기활민방》이라는 책을 짓게 되는데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신이 옛날 대마도를 정벌한 뒤, 왜선을 추격하여 전라도 연해변 섬을 돌아보니 거기는 소나무가 무성하나 뭍(육지)과 거리가 멀어서 왜구들이 매양 배를 만들기 위해 오는 것이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마도에 배를 만들 만한 재목이 없으므로 반드시 전라도 섬에 와서 배를 만들어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세종실록》3년(1421) 8월 24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왜구들이 조선 바닷가를 침범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배를 만들기 위한 소나무를 구하기 위함이지요. 이때 보고를 했던 이순몽은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를 모조리 베어 왜선이 오는 것을 끊게 함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세종은 "어찌 다 벨 것이 있겠는가?"라며 들어주지 않습니다. 대신 병선을 가지고 들어가서 소나무를 보호하면서 배를 만들도록 합니다. ▲ 궁궐과 배를 만드는데 썼던 조선소나무 금강송은 속이 누런 황장목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이는 소나무가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으며 강도가 높고, 게다가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독립지사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3.17~1932.11.17) 선생이라고 하면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당 선생은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형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6형제 50여 식구들이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가문이지요. 우당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로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10대조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입니다. ▲ 이회영 선생 유품, 중국식 옷과 모자 신발 이러한 우당 선생의 가문이 더욱 역사에 빛나는 것은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 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를 실천했기 때문이지요. 우당 일가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써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63년,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가 3000만 달러까지 내려감에 따라 정부는 파산 직전까지 가는 큰 혼란을 맞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동의 오일쇼크 탓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73년에 정부에서 지불한 원유 값은 3억516만 달러였는데 1974년에는 8억 달러가 늘어난 11억78만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1년 사이에 3억880만 달러에서 20억2270만 달러로 늘었고 자본 대출량도 2억9000만 달러에서 19억9840만 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정말 막다른 길목이었다. 이때, 박정희 정부의 오원철 경제수석은 중동진출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고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중동진출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게 된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듯,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진행된 해결책이었다. 1974년 4월 25일 장예준 건설부장관을 비롯해 부처의 각료급 인사들과 7개 민간업체로 구성된 사절단이 중동에 파견되었다. 직접 중동에 가서 현지를 보고 오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 시찰 성과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금수강산이 제아무리 좋아도 정든 님 없으면 적막강산이라 무심한 저 달이 왜 이다지도 밝아 울적한 심회를 어이 풀어 볼가 뒷동산 숲속에 두견이 우는 소리에 임 여읜 이내몸 슬퍼만 지노나 귀뚜라미 뉘 못잊어 울어울어 밤새우고 이 몸도 임을 잃고 이 밤을 울어 새우네" ▲ 함경도와 평안도 안주에서 줄리던 애원성을 부르는 모습(문화재청 제공)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이어온 함경북도 사람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낸 민요 “애원성” 일부입니다. 함경도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일을 할 때도 부르고, 이곳저곳 다닐 때도 불렀으며 힘들고 고단할 때 흥얼거리며 마음을 달랬던 노래지요. 또 고향을 등지고 온 실향민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표현하는 망향가일 수도 있습니다. 애원성은 2005년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지요. 지금 북녘에서는 맥이 끊겼지만 현재 남녘에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함북민속예술회 김길자 회장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경북도의 애원성 말고도 평안도 안주 지방에서 부르는 <안주 애원성>이라는 민요도 있지요. 이 노래는 베를 짜려고 실을 잣던 아낙네들이 부르던 노래입니다. 그래서 '물레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흰 바탕에 눈부신 푸른빛을 무늬로 넣은 청화백자는 백옥처럼 희고 고운 백자와는 또 다른 맛을 풍기는 예술품이다.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언제부터 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조연간(1455-1468)에 청화백자의 물감을 나라 안에서 개발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제작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전해지는 조선시대 청화백자로 가장 오래된 것은 1456년에 만든 세조의 장모이자 윤번의 아내인 흥연대부인묘지이다. 이 시기의 묘지(墓誌)는 분청사기가 주류인데 견주어 이것은 청화백자로 되어 있다. ▲ 백자청화 구름용무늬 항아리(왼쪽), 백자청화 홍치이년(弘治二年 명 소나무대나무무늬 항아리 ▲ 백자청화 꽃무늬 표주박병(왼쪽), 백자청화 함풍년제(咸豊年製) 명 구름용산수무늬 다각접시(가운데), 백화청자 괴석꽃무늬 사각함 ▲ 최초의 청화백자, 흥년대부인묘지 조선의 청화백자는 문인이나 지식인 취향을 반영한 사군자, 산수, 인물, 동물화를 그려 넣기도 하고 분재나 괴석, 화초를 그릇 면에 가득히 채워 넣어 그리기도 했고 조선 후기에는 십장생이나 봉황, 호랑이, 박쥐, 복숭아와 같은 장수와 복을 비는 마음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 가운데 셋째인데, 무심하게도 나의 아내는 그동안 나와 함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해왔으나 뜻하지 않게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아. 아내와의 사이에 난 저 두 딸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배반했으니 그 행위를 생각하면 칼을 품고 가서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앞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서 우리의 혼인관계는 파한 뒤 위 댁(宅)으로 보낸다. 만일 뒷날 말썽이 생기거든 이 수기로 증빙할 일이다. 을유년 12월 20일 최덕현 수표” ▲ <최덕현 수기> 전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위 기록은 전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최덕현 수기”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 수기가 아내의 이혼을 허락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와 어려움 속에서도 동고동락해왔지만 이제 배반하고 돌아서서 다른 남자에게 갑니다. 그래서 아내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표현되어 있으며, 또 남겨진 두 딸에 대한 걱정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도기(陶器), 자기(瓷器)로 나누는데 자기 말고도 백토 따위를 섞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을 사기(沙器)라고 합니다. 이러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사기장(沙器匠)이라 부르며 사기장은 사옹원(司饔院)에서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릇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공조로 하여금 미리 만들게 하고, 사옹원(司饔院)과 사복시(司僕寺)에서 받아서 보관하였다가 행차가 있을 때에 역마(驛馬)로 운반하여 사용케 하라.” 이는 세종실록 11권(1421)에 나오는 이야기로 당시 임금의 행차시에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아예 사옹원에서 그릇을 만들어 나르도록 하는 기록입니다. ▲ 김정옥 사기장이 사기를 빚는 모습 우리나라 도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천하제일의 비색청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기관인 사옹원(司甕院)에서 자기를 만들었는데, 경기도에 분원을 설치하여 왕실에서 사용하는 자기를 특별히 제작,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 관요(정부 관리 아래에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이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져 민요(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번창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선왕의 장례와 우리 태조의 장례에 저자의 잡색 여자들을 불러다 울며 따라가게 하고, 이를 통곡비(痛哭婢)라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 삼가 《두씨통전(杜氏通典)》·《당원릉장의(唐元陵葬儀)》를 상고하여 보면, 공주와 내관 등이 둘러싸고 모두 울고 발을 구르고 하며 따라간다 하였습니다. 이제 태행 상왕(太行上王)의 장례에는 공주는 후궁으로 대신하고, 사정이 있으면 관비(官婢)로 울며 따라가게 하소서.” ▲ 조선시대엔 장례식 때 대신 통곡해주는 통곡비가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는 《세종실록》1년(1419) 12월 21일 기록입니다. 지금이야 없어진 풍습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상가에 울음소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상가의 수준을 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상주들은 장례식 때 곡하는 여인들은 고용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위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왕실 장례식에 우는 노비 곧 통곡비(痛哭婢, 또는 곡비)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 울어주는 여성인 통곡비는 왕실의 장례식뿐만이 아니라 왕릉을 옮길 때와 사대부가의 장례식 때도 썼다고 합니다. 고구려 때에는 장례식 때 북을 치고 풍악을 울렸다고 하는데 성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원(庭園)은 집에 딸린 뜰이나 동산을 말한다. 조경(造景)은 식물재료토목재료물 또는 조형물을 이용하여 쾌적한 생활공간을 꾸미는 일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은 정원을 꾸미는 일이다. 한중일 세 나라의 정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것과 자연을 축소시켜 정원에 끌어들이는 일본에 견주면 자연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한국의 정원이다. 그 정원과 조경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할 2014 대한민국 조경문화박람회가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그 박람회를 잠시 엿보기로 한다. ▲ 2014 대한민국 조경문화박람회 들머리 ▲ 2014 대한민국 조경문화박람회에서 즐거운 한 가족 ▲ 공존 ▲ White Dream ▲ 슈퍼맨 ▲ Dripping,아이들의 신나는 놀이터 ▲ Long Jou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