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자, 이제 미국이다. 자동차의 본고장 철옹성 미국에 상륙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돌아간 현대자동차. 1985년 1월 샌프란시스코 대리점 컨벤션 기간 중에는 무려 3000여 개나 되는 미국 내 유명 대리점이 앞 다투어 방문해 현대만을 위한 잔치가 될 정도였다. 현대가 이렇게 미국에서 첫 대면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웃 캐나다에서의 포니 돌풍이 미국 언론을 통해 속속들이 알려진 덕분이었다. 1985년 4월 드디어 미국 LA에 600만 달러를 투자하여 현지법인 Hyundai Motor America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현대 포니의 인기가 올라가자 언론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뉴스위크지 85년 10월호는 한국이 온다(Koreans coming)라는 제목의 표지 특집으로 포니 엑셀을 크게 소개했다. 현대는 1986년 GM, 포드, 클라이슬러가 버티고 있는 미국땅 플로리다주 잭슨빌항에 포니 1호차를 처음 내려놓았다. 그리곤 1년 만에 20만대의 판매실적을 내놓았다. 미국 환경보호청이 발표한 86년 미국 내 자동차판매 베스트10에 들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1987년 26만대, 1988년에는 30만대, 그리고 1990년에는 미국 현지 판매 10
▲ 상궁이 명성황후를 왕비로 책봉하겠다는 교서를 읽는다. 황후는 북쪽에 4배하고 앉아있다. ▲ 고종의 어가행렬이 운현궁으로 들어오고 있다. ▲ 고종이 가마를 타고 운현궁으로 들어오고 있다. ▲ 행사 중간 중간에는 궁중무용 곧 정재(呈才)를 선보였다. ▲ 수백명의 관객이 운현궁 마당을 꽉 메우고 있다. ▲ 가례를 마친 명성황후(왼쪽)와 고종이 나란히 좌정하고 있다.(운현궁 제공)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제 9월 20일 오후 2시에 서울 운현궁에서는 “고종명성후가례” 행사가 있었다. 원래 “가례(嘉禮)“는 조선시대 나라에서 시행하기로 규정한 다섯 가지 의례(五禮) 곧 길례(吉禮, 상례와 장례에 들어있지 않은 모든 제사), 흉례(凶禮, 상중에 하는 의례), 군례(軍禮, 군사에 관한 예의), 빈례(賓禮, 손님을 접대하는 예), 가례(嘉禮) 가운데 하나로 가례는 크게 혼례(婚禮)와 관례(冠禮, 어른이 되는 예식)가 있다. 운현궁에서 재현한 “고종명성후가례”는 1866년 3월 치러진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1852년생 명복(李命福, 고종의 아명으로 고종이란 이름은 죽은 다음 얻은 묘호)과, 1851년생 여흥(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법고창신(法古創新) 할 때 전통의 올바른 계승은 된다고 했는가? 여기 판소리의 법고창신에 나선 이가 있다. 그는 소리꾼 박민정으로 10월 11일(토), 12일(일) 오후 4시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 창작판소리 장태봉을 공연한다. 버려지는 아이들, 게임중독, 폭력, 살인, 자살 등의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점점 잔인하고 끔찍하게 진화해 가고 있다. 문제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지만, 사실 문제의 씨앗은 우리 안에 있다. 씨앗을 터트리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일 것이다. 그 선택을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단연, 가정이다. 또 가정 에서 가장 큰 영향력은 부모에게 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녀에게 물려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맡은 정화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문제들이 빠른 속도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화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며, 어떤 고민과 이야기들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고전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담을 그릇을 소리꾼 박민정은 찾아보았다. 박민정은 아홉 명 이상의 자식을 둔 흥부가, 흥부네 아홉 자식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예부터 태는 태아(胎兒)의 생명을 태어나게 한 것이라고 하여 태아를 낳은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습니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다른데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지요. 태는 안팎으로 두 개의 항아리에 넣은 뒤 주인공의 생년월일시와 이름을 적은 지석(誌石)과 함께 큰 돌로 된 함에 봉해 명당을 찾아 태실(胎室)을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원주 태장동에서 한림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태실이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요. 태지석 기록에 따르면 이 태실의 주인공 복란은 1486년 10월 13일 진시에 출생했고 태는 같은 해 12월 29일 원주에 묻혔습니다. 복란은 성종의 세 번째 계비인 숙의 윤씨(정현왕후)의 딸 곧 공주의 신분으로 추정되지요. ▲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된 <복란의 태실(胎室)>(왼쪽), 태실 안에 묻은 태항아리 복란의 태실 석함은 한림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될 때 석함 뚜껑이 반쯤 열려 도굴된 채였습니다. 그리고 석함 주변에는 백자와 옹기들이 묻혀 있었는데 석함 안에 있던 외항아리(백자 태호)와 태지석은 현재 동국대 박
[그림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칼을 휘두르는 것이 예술이 됩니다. 바로 검무를 말하는데 검기무(劒器舞)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지요. 《동경잡기(東京雜記, 1845년 중간(重刊)된 경주의 지리서) 》와 ≪증보문헌비고,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의 기록에 나온 검무의 유래를 보면 신라 소년 황창(黃昌)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왕을 죽이고 자기도 죽자, 신라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 얼굴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종 때 펴낸 《악학궤범》에 나와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성행하지 않은 듯한데 그 뒤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의 <관황창무 觀黃昌舞>라는 칠언고시에 따르면 기녀들에 의하여 가면 없이 연희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뒤 경술국치 이후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민간사회로 나온 기녀들이 계속 검무를 추었지만 일부 지방만 그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 신윤복 그림 풍속도화첩 가운데 <쌍검대무>, 국보 제135호 지금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가 유일합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국악이 따분하고 지루한가? 여기 절대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다. 서도민요 젊은 소리꾼들과 국악 연주자들이 한데 모여 꾸린 국악그룹 별악(樂)이 그들이다. 별악(別樂)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별다르거나 특별한 음악이라는 뜻이란다. 그들이 정말 별다르거나 특별한 음악을 할까? ▲ 4명의 서도민요 그룸 별악(樂)이 진지하게 소리를 한다. (사진작가 김훈 제공) ▲ 서도잡가 제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음악을 바꿔 노래한다.(사진작가 김훈 제공)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그들은 어제 9월 16일 밤 8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내놓았다. 국립국악원 공감! 젊은 국악 시리즈의 하나로 열린 별악과 음악 사이 그대 그때는 맨 먼저 오늘 날이야로 신나게 문을 연다. 옷은 한복을 변형한 부담 없는 차림이다. 어! 그런데 두 번째 선보이는 음악 송가(送歌)는 갑자기 진지해진다. 그리고 일곱 번 째 음악 제전- 바람의 흔적은 더욱 무겁고 뭔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음악이다. 그냥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오열장탄(嗚咽長嘆)에 애곡(哀哭)을 할 뿐이지 / 뒤 따를 친구가 전혀 없구려 / 잔디를 뜯어 모진 광풍(狂風)에 휘날리며 /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위는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이 불렀던 독립군가의 일부입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는 대한독립단,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비단, 의군부, 광복단, 태극단, 광한단,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대한통의부, 광정당 등의 독립군 조직이 있었고, 연해주에서는 혈성단, 경비대, 신민단 등이 조국광복을 위해 일본군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독립군들은 연합하여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1933년 지청천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 작전으로 대전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격파했지요. 그러나 이 독립군 부대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필요했고, 임시 정부가 직할 군단 편성을 하기 위해 만주에 있는 독립군의 이동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부분의 독립군이 중국 본토로 이동해 광복군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이 1940년 오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는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의 무덤 명릉(明陵)이 있습니다. 명릉은 쌍릉인데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1667~1701)의 무덤과 나란히 있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숙종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1687~1757)는 숙종의 곁에 잠들지 못하고 오른쪽 언덕 위에 따로 무덤이 있습니다. ▲ 서오릉에 있는 숙종(肅宗)과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무덤 명릉(明陵) 그런데 정작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仁慶王后 金氏)가 묻힌 익릉(翼陵)은 명릉에서 좀 떨어진 곳에 홀로 묻혀있지요. 그 까닭은 숙종이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왕후 능을 조성하면서 그 옆은 자기의 자리로 점찍어서 미리 비워놓았기 때문에 인경왕후가 숙종 곁에 올 수가 없었던 거지요. 정비가 아닌 두 번째 부인과 함께 묻히려 한 숙종의 마음은 숙종만 알겠지요. 그런가 하면 서오릉 한 구석에는 숙중의 후궁 장희빈의 대빈묘(大嬪墓)가 있습니다. ‘묘(墓)’라는 이름은 원래 대군이나 공주, 옹주, 임금의 생모가 아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단아한 모습의 조선 사대부가 여성은 아침마다 빗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습니다. 이때 머리를 빗는 도구들은 빗접에 담아 두었지요. 빗접은 모양에 따라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빗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창호지 따위를 여러 겹 붙여 기름에 절여서 만든 것과 나무로 짜서 만든 것이 있습니다. 빗접은 쓰임새에 따라 크고 작은 서랍이 여러 개 달립니다. 또 꾸민 방법으로 나누면 먹감나무·느티나무·오동나무 따위로 만들어 나뭇결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개[螺塡]를 붙여 화려하게 꾸민 “나전빗접”, 쇠뿔[華角]로 장식한 “화각빗접”이 있습니다. 그 무늬는 대개 십장생,원앙,연꽃,산수 따위로 여성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것들입니다. ▲ 조선시대 머리 손질하는 도구들을 넣어두던 "나각빗접" 항상 경대와 함께 머리맡에 두고 썼던 빗접은 빗빗솔(빗살 사이에 낀 때를 빼는 솔)·빗치개(가르마를 타거나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 쓰는 도구)가르마꼬챙이(가르마를 타는 데 쓰는 가느다란 꼬챙이)뒤꽂이(쪽찐 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꾸미개)동곳(상투가 풀리지 않게 꽂는 물건) 같은 머리를 손질할 때 썼던 도구들을 넣어 두었습니다. 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민요와 노는 젊은 국악 그룹 별악(樂)이 오는 9월 16일(화)에 국립국악원 우면당 상설공연 공감! 젊은국악 무대에 오른다. 별악(樂)은 4명의 개성 있는 경서도 소리꾼과 해금, 거문고, 타악 3명의 연주자들이 모여 옛 조상들의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는 전통민요를 지금의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노래하는 젊은 예인 단체이다. 국악계 슈퍼오디션 천차만별 콘서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창작음악계에서 꾸준히 활동 해온 별악(樂)이 기존의 밝고 재치 넘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삶과 음악에 대한 진지한 시각으로 별악과 음악사이 그대 그 때를 선보인다. 첫 잔 부어 산제(山祭)하고 두 잔 부니 첨작(添酌)이요 석 잔 부어서 분상묘전(墳上墓前)에 퇴배연후(退盃然後)에 옷은 벗어 나무에 걸고 그냥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오열장탄(嗚咽長嘆)에 애곡(哀哭) 할 뿐이지 뒤 따를 친구가 전혀 없구려 잔디를 뜯어 모진 광풍(狂風)에 휘날리며 왜 죽었소 왜 죽었소 옥같은 나 여기두고 왜 죽었단 말이오 선영(先塋)에 풀이 긴들 절초(折草) 할 이 뉘 있으며 한식명절 당도하여도 잔 드릴 사람이 전혀 없구려 -서도잡가 제전 가운데- 이번 공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