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무민로 39길 89(대자동 영사정)에서 어제 2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7호로 지정된 <영사정 복원 준공식>이 있었다. 영사정(永思亭)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라는 뜻으로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이 살던 집이다.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金一振)의 재사(齋舍)겸 살림집으로 300여 년 전인 1709년에 이 집을 지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살림집 연구에 있어 중요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고택으로 앞으로 역사체험 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된다. 이날 준공식자리에서 문화재 지정에 큰 공을 세운 경주김씨의정공파 종중 김덕경 대표는 "내가 태어나서 수십 년 살던 이곳이 다 쓰러져 갔지만 문화재가 되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이렇게 번듯하게 문화재가 되어 감개무량하다. 이제 조상들을 뵐 면목이 선다."고 소감을 말했다. ▲ 영사정 본원 준공식 테이프 자르는 모습. ▲ 영사정이 문화재가 되기까지 큰 공을 세운 사람들(왼쪽부터 한겨레건축사사무소 최우성 소장, 경주김씨의정공파 종중 김덕경 대표, 그 아우 김순경 선생) 그러나 이러한 영사정은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東家勢炎火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高樓歌管起 높은 누각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北隣貧無衣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腹蓬門裏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위는 《홍길동전》의 지은이인 허균(許筠)의 누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한시(漢詩) “감우(感遇)” 일부입니다. 호가 “난설헌”이요, 본명은 초희(楚姬)지요. “감우(感遇)”란 그냥 생각이 나서 썼다는 얘기지만 피지배층의 빈곤과 지배층의 부유를 비판하며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허난설헌의 눈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이 달공이 쳐들고 / 땅바닥 다지니 땅 밑까지 쿵쿵거리네 (줄임) 성 위에 또 성을 쌓으니 / 성벽 높아 도적을 막아내겠지만 / 무서운 공적(恐賊) 수없이 몰려와 / 성 있어도 막지 못하면 어찌 할 거나.”라고 성 쌓기에 지친 백성의 한을 노래하기까지 합니다. ▲ 허난설헌 글씨와 그림 양간비금도, 22.5×22.5cm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던 허난설헌(1563 ~ 1589).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금이야 우리나라 최고의 휴양지로 외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제주도는 예전엔 유배당하는 사람이나 가는 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제주도를 처음으로 소상히 알린 것은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입니다. 탐라순력도는 조선 숙종 28년(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제주도에 부임해온 이형상(1653~1733)이 그해 관내 각 고을들을 돌며 진행한 행사와 풍광들을 제주목의 김남길이라는 화공이 가로 35㎝, 세로 55㎝의 종이에 그린 총 41폭의 채색 화첩이지요. ▲ 제주도 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한라장촉(漢拏壯囑)" 여기엔 제주도 지도와 관아와 읍성, 군사시설을 비롯해, 활쏘기나 잔치 따위 풍물들을 담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전체 화첩 구성은 독립된 제주도 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는 당시 제주도 전도(全圖)인 한라장촉(漢拏壯囑) 1쪽, 순시 장면 등 40쪽, 그림에 관한 기록 2쪽으로 이뤄졌습니다. 맨 처음 “제주도 전도”로 시작해서 조천조점, 김녕관굴, 정방탐승, 서귀조점, 현폭사후·명월시사, 고원방고, 산방배작, 제주양로 같은 화첩으로 이어집니다. 이 화첩을 보면 목사 일행은 조천성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고가 도로 밑, 평상에 아저씨들 몇이 앉아있다 삼화표구, 전주식당, 영진오토바이 주인들이다 (줄임) 무슨 얘기 끝에 대화가 뚝 끊겼는지, 평상에 앉은 네 사람의 방향이 제각각인 채 침묵의 무릎을 세우고 있다 저 장면을 사진 찍거나 그림 그려서 권태오후 같은 제목을 붙이면 제격일 텐데 아저씨들 저녁이 오면 슬슬 일어나서 고기를 굽거나 화투장을 만질 것이다. ▲ 평상(平床), 조선시대 19세기, 개인 소장 정병근 시인이 쓴 평상(平床)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평상(平床)은 나무 또는 대나무를 써서 그 위에 사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만든 네모난 대(臺)로 대개 두 개가 한 쌍을 이루는데. 평상의 길이와 너비는 대개 2:1의 비율이지요. 평상의 가에는 난간이 있기도 하는데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기도 합니다. 평상은 주로 대청마루나 누(樓)마루 또는 나무 아래에 놓고 이 위에서 쉬거나 글을 읽거나, 손님과 더불어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윤두서(尹斗緖, 1688~1715)가 그린〈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에는 여름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평상을 놓고 낮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최근 영화 명량이 개봉 한 달도 안 되어 누적 관객수 16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이와 함께 서점가에서는 이순신 열풍이 불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왜 한국인들은 이렇게 명량에 이순신에 열광할까? 전문가들은 암울한 시기에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열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대열에 특별한 이순신 책이 등장했다. 바로 유광남 작가의 《이순신의 제국(스타북스)》이 그것이다. 꿈을 꾸었다. 아주 혹독한 한차례 폭풍과도 같은 꿈을 꾸었다. 조선에 참담함을 안겨 주었던 일본을 기습하고 천황을 사로잡았다.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던 선조가 폐위되고 일본이 항복하였다. 조선의 왕조를 바꾸는 이순신의 반역이 모의되었다. 그것은 모두 죄인의 신분으로 의금부 수옥(囚獄)에 감금되어 있을 때의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꿈이다! ▲ 《이순신의 제국 》, 유광남, 스타북스 《이순신의 제국》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앞뒤 보지 않고 임금에 충성하는 장군으로만 알아왔다. 하지만, 소설은 이순신의 역성혁명을 얘기한다. 이순신이 일본을 기습하고 천황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선조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멋지게 해치운 정주영은 또 하나의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 수리가 아니고 번듯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자동차산업이야말로 현대산업의 꽃이자 국력의 잣대이다. 또 다른 산업과 달리 철강・기계・전기・전자・화학・섬유 등 2만 여개의 부품을 각기 다른 생산공정을 거쳐 생산하고 그것들을 조립해서 완성하는 종합산업이 아니던가? 더구나 정주영은 처음 사업을 자동차로 시작했었기에 자동차산업의 완성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 중의 산업이라는 자동차산업이라는 것이 어디 꿈만 가지고 될 일이랴. 그 나라 최대의 자본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는 미국・일본・서유럽 등 선진국들의 전유물로 인식하던 때였다. 1966년 4월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가 한국 진출을 위해 시장 조사와 함께 합작 법인 설립을 위해 타진했다. 하지만, 그들이 서울에 왔을 때 단순한 건설업체로 인식되던 현대는 접촉 대상자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그 무렵 신진공업사는 정부 도움으로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코로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아베 씨 내 좋은 아이디어가 있소 / 광복 두 시간 전 총독부 학무국 / 동인이 찾아간 사무실 안 침묵이 흐른다 / 아 아베 씨 좀 보소 / 그걸 만듭시다 / 시국에 공헌할 작가 단을 꾸리자구요 / 아베, 머리 절레절레 흔든 뜻은 / 이런 쓰레기 같은 조선놈 /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부하기에 바쁜 조선놈 / 어서 꺼졌으면 싶었겠지 / 그리고 두 시간 뒤 조선은 빛을 찾았다.” (뒤 줄임) 이는 이윤옥 시인의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에 나오는 ‘김동인’ 시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104년 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치욕스런 날 “국치일(國恥日)”이지요.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을 가리켜 “초기 근대문학의 확립과정에서 문단을 주도했던 이광수 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줏대 없이 총독부에 빌붙어 광복 2시간 전까지 아첨을 했던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소설가 김동인, "천황폐하 아래서 우리는 한 형제"라고 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젓갈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상 기록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에 완성한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옵니다. 신라 신문왕이 8년(683년)에 일길찬 김흠운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을 때 비단,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따위와 함께 해(醢) 곧 젓갈 135수레를 주었다고 되어있어 이때 이미 궁중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젓갈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늘 먹던 음식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사람들의 젓갈 사랑을 짐작할 만하지요. 또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1236년)》에는 젓갈을 담그는 방법에 소금에만 절이는 염해법(鹽醢法)과 젓갈 재료에 소금과 누룩, 술을 혼합한 독특한 방법의 어육장해법(魚肉醬醢法)이 있었고, 젓갈과 절인 생선에 익힌 곡물과 채소를 함께 발효시키는 지금과 비슷한 식해(食醢)도 만들어 먹었던 기록이 나옵니다. ▲ 새우젓, 밴댕이젓, 굴젓(왼쪽부터) 그런데 이처럼 “젓갈”이 고려시대에 들어 특히 발달했던 까닭은 고려 태조 때, 도염원(都鹽院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홍범도 장군의 얼굴 오른쪽 볼수염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위로 자랐드랬소. 왜냐하면 너무나도 총을 많이 쏘았기에, 총을 쏠 때마다 총탁을 오른 쪽에 대기 위해 오른쪽 볼을 스쳐 겨냥하면서 올렸기 때문이오. 총 쏘는 내기도 몇 번 해보았는데 정말 명포수였소. 노년이었지만 우리 젊은 것들이 어쩔 수 없었소. 극장 수위로 일하실 때 우리는 처음 그가 그 전설적인 영웅인, 일제에 있어서는 범인인 홍범도인 줄 몰랐드랬소. 김세일이 소설을 쓰고 태장춘이 희곡을 쓰고 하면서부터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를 무한히 존경하였소. 그는 자기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소. 이는 고송무가 쓴 《쏘련의 한인들》(이론과 실천 펴냄)에 나오는 카자흐스탄 조선극장 배우인 안 미하일 쓰쩨빠 노위츠의 증언입니다. 오늘은 독립운동가 홍범도(洪範圖, 1868 1943) 장군이 태어난 날이지요. 홍범도 장군은 1907년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여러 포수들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과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사람이 처음 뱃속에서 잉태되었을 때는 누구나 하늘로부터 똑같은 천품을 부여받지만, 뱃속에서 10달을 지내면서 사람의 좋고 나쁜 품성이 형성된다. 따라서 사람의 품성이 결정되는 처음 10달의 태교가 출생 뒤의 교육 보다 중요하다.” 이 말은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가 1800년(정조 24)에 아기를 가진 여자들을 위하여 한문으로 글을 짓고, 아들인 유희(柳僖)가 음의(音義)와 언해를 붙여 1801년(순조 1)에 펴낸 《태교신기(胎敎新記)》에 나오는 것입니다. 《태교신기》는 모두 10장으로 나누어 있는데 제1장 “지언교자(只言敎字)” 곧 “자식의 기질적인 병은 부모로부터 연유한다.”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제10장에서 “추언태교지본(推言胎敎之本)” 곧 “태교는 남편에게 책임이 있으니 부인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맺습니다. 이 책은 여성들에게 태교를 권장하기 위한 교육지침서로 일찍이 태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는 데 그 뜻이 있지요. 또 이 책은 언해본으로도 펴냈는데 19세기 초기의 우리나라 한자음과 근대국어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 사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