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들은 일제에 여러 가지 형태로 투쟁했습니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교육운동으로 배달겨레가 깨어나도록 한 분도 있고, 목숨을 건 만세운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언론을 통한 일장기 말소 투쟁도 있었지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쥔 뒤 가슴의 일장기를 1위에게 주어진 월계수로 가렸고, 이를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손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하여 배달겨레의 기개를 보여주었습니다. ▲ 1936년 8월 25일 일장기 말살사건의 동아일보(왼쪽), 베를린올림픽 시상대에서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린 손기정 선수 일장기가 선명한 사진이 전송되어 왔을 때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기사를 내보냈는데 조선중앙일보의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인쇄가 잘못된 것인지 일부러 지운 것인지 구분이 모호했기에 총독부의 검열을 무사히 넘겼지요. 이 사실을 안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도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인쇄 상태가 조선중앙일보보다 좋았기 때문에 일부러 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주베일 산업항 공사,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공사를 해치운 그것도 공기단축이란 성과까지 올리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이 공사로 현대건설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에 들어선 듯했다. 그러나 인생살이란 것이 늘 좋을 수만은 없는 법. 하루 평균 3000여 명이 넘게 일하는 현장에서 정주영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저것들 모두 때려 부숴버리자. 혼 좀 내줘야 해. 우리를 물로 봐도 분수가 있지. 덤프트럭 기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근처 동아건설 덤프트럭 기사들에 견줘 임금을 반도 못 받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동아건설은 개개인에게 물량 하청식으로 일감을 주어 쉼 없이 하루 16시간까지 일을 한 까닭으로 임금을 많이 받았는데 단순비교로 자신들의 임금이 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20㎞밖에 떨어지지 않은 석산까지를 시속 20㎞로 천천히 왕복하는 태업을 했다. 그러자 직원 한 사람이 공기에 쫓긴 나머지 덤프트럭 기사와 말다툼을 벌이다 안전모로 기사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 직접적인 폭동의 계기가 되었다. 현장 직원은 늑장을 부리는 기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 다급한 마음에 그랬지만 머리를 맞은 기사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흰 이슬 맺히는 팔월달 남쪽 고을 / 八月南州白露繁 몇 그루 감나무에 뜨락이 환히 빛나누나 / 數株殷葉照荒園 한자의 시에 나오는 파리완을 대하는 듯 / 如看韓子玻瓈盌 형양의 먹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듯 / 似帶滎陽翰墨痕 객점 사립문도 문득 생기 넘치나니 / 店舍柴荊翻起色 초나라 귤나무에 비겨도 좋으리라 / 楚鄕橙橘好同論 두류산 아래로 거쳐서 갈 나의 발길 / 吾行會過頭流下 단풍 진 감나무 숲 산문(山門)에 끝없이 이어지리 / 無限霜林擁石門 이는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가운데 한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감나무 숲(柿林)”이라는 시다. 첫 줄에 흰이슬 맺히는 이란 말은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의 가을날을 표현한 말로 이때 음기(陰氣)가 점점 성해지면서 이슬도 흰 색깔로 변한다고 한다. ▲ 오늘은 처서, 귀뚜라미와 모기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오늘은 24절기의 14번째인 처서(處暑)다.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부르지만 낱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는 뜻이기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으랴 / 핏덩이 아들 두고 늙으신 노모 앞서 죽음 택한 의병장 남편 / 왜놈 칼 맞아 선연히 배어든 피 묻은 속적삼 / 부여잡고 울 수만 없어 /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떠난 만주 땅 / 곳곳에 병들고 상처받은 동포들 삶 / 보살피고 어루만진 따스한 손 (뒤 줄임) 이는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 실린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이란 제목의 남자현 애국지사께 드리는 헌시의 일부입니다. 여자 나이 46살에 압록강을 건너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남자현 애국지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19살에 결혼하여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한 남편 김영주 애국지사의 숭고한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 기왓장에 새긴 남자현 애국지사(오른쪽), 아들 앞에서 숨져가는 남 애국지사(경북독립운동기념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김영주에게 시집 간 열아홉 새댁은 단란한 신혼 생활도 채 누리지 못한 채 의병에 가담하게 된 남편이 그만 전사하자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을 홀로 키우며 일본에 복수할 날을 기다립니다. 남자현 애국지사는 기회를 엿보다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繞舍循除皆種菊 집둘레와 섬돌 근처 온통 국화 심었더니 開窓隨處可看花 창문 열면 곳곳마다 국화꽃 만발했네 번嫌堆岸黃金色 꽃더미 언덕 이뤄 황금색이 넘쳐나니 却似貪錢富貴家 돈만 아는 부자라 남들이 욕할는지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잠곡(潛谷) 김육( 金堉, 1580~1658)의 “국화”라는 한시입니다.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청렴한 성품을 지녀 집안에 온통 국화가 핀 것도 돈만 아는 부자라고 욕할 것을 걱정할 정도였지요. 김육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우고, 12살에 “육송처사전(六松處士傳)”과 “귀산거부(歸山居賦)”를 지어 글솜씨를 뽐낸 천재소년이었습니다. ▲ 잠곡(潛谷) 김육( 金堉) 초상화(왼쪽, 실학박물관), 경기도 평택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그런데 김육의 삶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주경야독(晝耕夜讀)”입니다. 1613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 직전까지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서 식구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그만치 10년 동안을 말입니다. 처음에는 살 집이 없어 굴을 파고 헛가래를 얽어 살았고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송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화가 배운성(1900~1978)이라고 하면 언제나 유럽 유학 1호라는 별칭이 따라다닙니다만 오늘날과 같이 누구나 쉽게 떠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시절이라 더욱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고아가 되어 장안의 만석꾼 집안의 머슴으로 들어갑니다. 천성이 싹싹하고 영리한 배운성은 주인의 눈에 들어 중동학교 고등과(1년제)를 마치고 주인 아들의 말동무 겸 몸종으로 유학을 떠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그 이전에 일본 와세다대학(192022년)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22년 독일로 건너가게 되지요. 독일에서는 베를린국립미술종합대(192530년)에서 공부했으나 도중에 유학중인 주인집 아들이 병이 나는 바람에 그를 귀국시킵니다. 물론 이때 함께 들어왔다면 배운성의 역사도 그것으로 끝이 나겠지만 그는 홀로 남아 미술공부를 계속하였고 1927년 파리 살롱 도톤전 입선으로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어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미전 1등상을 비롯해 국제미전에서 잇따라 상을 받고 당시 세계 3대 화랑 중 하나로 꼽히던 파리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는 등 유럽 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 화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그시 감은 눈과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보면 그것은 바야흐로 法悅을 느끼는 듯 성스럽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평온한 모습일 수 있을까. 몸에 어떤 장식도 가하지 않은 裸身이다. 우리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만 해도 목덜미에 둥근 옷주름을 표현해서 法衣가 몸에 밀착돼 있음을 암시하지만 이 불상에선 가슴 부분이 가벼운 볼륨감으로 드러나 있고 목에 세 가닥 목주름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를 三道라 한다. 이는 세기의 베스트셀러 작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편 3 교토의 역사》(창비 펴냄)의 일본 교토 광륭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미륵반가상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는 위처럼 상반신에 이어 하반신도 극찬하고 있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참으로 섬세하게도 미륵상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광륭사 미륵상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음을 모릅니다. ▲ 일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왼쪽), 한국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많은 이가 두 미륵상이 꼭 닮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광륭사 것은 일본인의 얼굴이며, 한국 것은 조선인을 닮았다. 연합뉴스 2009년 9월 18일 치 일본국보 비밀캐는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아침 이슬 살포시 내려앉은 희고 고운 네 품안 아기잠자리 한 마리 하늘하늘 날갯짓하듯 작은 바람에도 설레는 네 마음 곧 내마음 위 시는 이고야 시인의 “잠자리난초”입니다. 꽃이 잠자리를 닮았다 해서 “잠자리난초”라 이르는 꽃을 보셨나요? 실제 꿀주머니가 길게 나와 있는 모습이 잠자리를 닮은 듯합니다. 야생 난초류 가운데 아름답기로 치자면 으뜸이라고들 말하지요. 선엽옥풍화, 잠자리란, 십자란, 큰잠자리란이라고도 부르는 잠자리난초는 온 나라 곳곳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햇살이 좋고 물살이 빠르지 않은 습지를 좋아하는 녀석이지요. ▲ 야생 난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잠자리난초' 키는 40~70㎝이고, 꽃은 8월에 피는데 줄기 윗부분에 흰색으로 무리지어 핍니다. 입술 모양의 꽃잎은 길이가 약 1.5㎝, 폭은 약 2㎝ 정도로서 가운데에서 3개로 갈라지고 아래로는 길게 꼬리와 같은 것이 붙어 있습니다. 열매는 10월 무렵에 열리는데 열매 안의 씨앗을 종이에 싸서 갈무리한 뒤 이듬해 봄에 이끼를 깔고 위에 먼지 날리듯 뿌린 뒤 물을 줘서 가라앉힌 후 신문지나 비닐로 10~15일 정도 덮어줍니다. 씨앗이 눈을 쉽게 뜨지 못하기 때문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오는 9월 14일까지 풍류탄생(風流誕生) - 최치원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21세기 인문정신의 재발견을 위한 첫 번째 전시로, 최치원이라는 1,200여 년 전의 역사인물을 통해 역사 속에 내재해 있는 풍류라는 우리 인문 정신문화의 원형질을 예술로 시각화하여 인문학의 재발견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우리시대 되찾아야 할 격조 있는 문화로서 풍류의 본 모습을 생각해보고 되살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나아가 역사 속에 내재해있는 풍류라는 우리 인문정신문화의 원형질을 예술로 시각화해 보여준다. ▲ 국보 315호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碑)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 쌍계사 진감선사비 전액(篆額, 전자체-篆字體로 쓴 현판이나 빗돌의 글씨) 또 인문학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최치원이 주창한 우리고유의 독자적인 풍류정신의 본질과 실체를 보여준다. 전시는 최치원의 삶의 역사현장과 원작을 비롯하여 그 정신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작품들로 이뤄진다. 비문탁본 현판 등의 원작과 현대미술 그리고 서예, 문인화, 현대무용, 북디자인 등 분야에서 재해석작품 등 총 100여 점이 한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입찰에 실패한 기업들의 훼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우디 무기상으로 사우디 왕족들과 대단한 친분을 과시하고 있는 한 인사는 현대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면 내 오른팔을 잘라도 좋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발주처가 현대의 OSTT(Open Sea Tanker Terminal) 곧 해상유조선 정박시설 공사 능력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현대는 OSTT에 대해 공사 경험은 물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발주처의 걱정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30m 바다 밑 암반에 30m 기초공사를 12㎞나 해내야 하니 이거야말로 난공사 중에 난공사 아니던가? 사실 입찰에서 현대보다 적은 금액을 써내 처음 낙찰되었다가 OSTT에만 한정된 금액으로 써낸 탓에 무효가 되었던 OSTT 공사의 전문기업인 브라운 앤드 루츠사의 입찰금액이 9억 달러인 것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브라운 앤드 루츠사가 현대에 찝쩍거렸다. 자기들에게 OSTT 부분을 하청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자기네 견적에서 금액을 낮추겠다고 했지만 브라운 앤드 루츠사에 하청을 주고 나면 현대는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