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한글이 세계 최고의 글자임은 누구나 알고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한글을 누가 어떻게 창제했으며, 주류문자가 되는 데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특히 왜 한글이 으뜸 글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물론 세종이 태어난 곳이 어딘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를 알기 위한 답사,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원장 남영신)이 《세종 한글로 세상을 바꾸다》,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같은 책들을 펴낸 이 시대 훈민정음학을 이끌고 있는 김슬옹 교수와 함께 하는 광화문 한글가온길 답사가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 한글가온길 답사는 김슬옹 교수의 안내로 어제(7월 30일) 오후 4시에 시작되었다. 먼저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이 답사의 의의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수정전(修政殿)으로 자리를 옮긴다. 세종 당시 집현전이 있었던 수정전 앞에 가자 김슬옹 교수는 퀴즈를 내 흥미를 돋우는 말로 답사의 서막을 내딛는다. 집현전, 훈민정음 창제가 아니라 반포와 관련 ▲ 세종대왕 시절 집현전이 있었던 수정전 ▲ 수정전 앞에서 김슬옹 교수가 답사자들에게 집현전과 훈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마을 서쪽 강변에는 공양왕과 관련이 있는 호랑이와 용을 상징하는 돌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동물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1973.12.24) 제원대교 북쪽 500m 지점에 용석(龍石)이 있고, 그곳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호석(虎石)이 있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 내려간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 위치를 정하여 필요한 석물을 준비토록 한 것으로 왕이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 충남 금산의 공양왕 용호석(龍虎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용석(龍石)은 소용돌이 모양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는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 아가미와 수염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석(虎石)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있지요. 털 무늬는 두툼하게 솟은 곡선과 동그라미가 교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동물상은 호랑이나 용의 특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열대야 때문에 잠을 못 드는 한여름입니다. 이때쯤이면 어릴 적 긴긴 여름밤에 모깃불 놓고, 옥수수를 쪄먹으며 옛날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따위를 듣던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 때 들었던 도깨비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이었나요? 도깨비 설화에서 나오는 도깨비 모습을 보면 '키가 팔대장 같은 넘', '커다란 엄두리 총각', '다리 밑에서 패랭이 쓴 놈', '장승만한 놈' 이라고 표현합니다. 도깨비의 모습도 우리와 친근하지만 성격은 더 그렇습니다. 도깨비는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데 힘이 장사이며,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거나 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신통력을 가졌음에도 우직하고 소박하여 인간의 꾀에 넘어가는 바보 같은 면도 있습니다. 또 사람의 간교함에 복수를 하기도 하지만 되레 잘되게 도와주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요. ▲ 연세대 박물관에 있는 전북 남원에서 출토된 청동도깨비상(왼쪽)고려시대의 토기 도깨비장식네귀병, 경북대 박물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결코 해코지를 하지 않는 도깨비는 대체로 인간적이며, 교훈적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이 그림은 조선 후기(17541822) 화가 김득신(金得臣)의 그림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입니다. 한 여름 나무 아래에서 일어나는 한 식구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지요. 그림 한 가운데에 큰 나무를 배치했으며, 남편은 웃통을 벗고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짚신을 삼고 있고, 아내는 단정하게 옷을 입고 머릿수건을 쓴 채 조용히 물레를 돌립니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기어오는 갓난아기의 모습까지 더해 한 식구의 단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 김득신(金得臣)의 그림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 호암미술관 더운 여름날이지만 나뭇잎, 나무아래의 풀, 여인이 입은 치마와 머릿수건 따위를 푸른빛으로 그려내 시원한 화폭을 만듭니다. 이 그림을 그린 김득신은 화원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란 벼슬을 받았고, 1791년 정조어진(正祖御眞)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리는 데에 이명기(李命基)김홍도(金弘道)신한평(申漢坪)과 함께 참여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요. 또 김득신의 동생 석신(碩臣)양신(良臣), 그리고 아들인 건종(建鍾)수종(秀鍾)하종(夏鍾)이 모두 화원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 응리(應履), 외할아버지 한중흥(韓重興)까지 화원이어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아스팔트길을 엿가락처럼 녹이는 폭염 아래서 여기 단돈 300환을 벌기 위하여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열 시간을 꼴깍 숨 막히는 격심한 노동을 하여 허약한 몸조차 돌보지 않는 모진 부녀자 군상이 있다. 시내 각처 로타리, 관청 앞 광장 등 잔디밭의 제초작업에 지난 십여 일 동안 임시 고용되어온 부인들이 그들이다. 이외에 도로보수, 지하도 보수 등에 고용된 수많은 인부들이 이에 못지않게 저렴한 임금으로 고용되어 희생적인 봉사를 하고 있다. ▲ 무더위로 한강놀이터 성황이라는 제목의 신문 사진, 동아일보 1955년 7월 25일 이는 1955년 7월 25일자 동아일보에 난 폭염과 싸우는 군상이라는 기사 일부입니다. 오늘은 더위에 누렁이도 혀를 내밀고 지쳐있는 중복(中伏)입니다. 중복 쯤 되면 피서를 가지 못한 사람들은 에어컨 앞에서 지쳐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위 기사에서처럼 에어컨은커녕 뜨거운 폭염 속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인부들을 보면 피서 얘기는 꺼낼 수조차 없습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에 따르면 복날의 말밑(어원)은 서기제복(暑氣制伏)에서 왔다고 합니다. 서기제복이란 서기(暑氣) 곧 여름의 더운 기운이 엎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머니 아버지 어서오소 /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나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중에 귀물은 머루나 다래 인간의 귀물은 너와 나로구나 내일은 북간도로 떠나가네 세간을 다 팔아도 여비 아니라네 검둥이 팔아 길 떠나네 북간도는 좋은 곳 이밥 먹는 곳 ▲ 남은혜 아리랑 음반 표지, 신나라 이런 아리랑을 들어봤는가? 우리가 익숙하게 들었던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본조아리랑이 아니다. 경기민요 남은혜 명창이 대표곡으로 부르는 노래 북간도아리랑이다. 우리 겨레는 대한제국 말기부터 먹고 살기가 어려워 북간도로 이주했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또 다시 집과 재산을 처분하여 북간도로 향했다. 그러나 만주가 희망처럼 행복한 곳, 이밥(쌀밥)을 먹는 곳은 아니었다. 세간을 팔고 검둥이를 팔아도 여비도 미처 안 되는 비참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북풍한설 몰아치는 북간도에서 맨주먹으로 땅을 개간하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또 북간도 이주자들 상당수는 독립군으로 맹렬하게 싸웠고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사실 정주영이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1960년대 말 조선소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때는 단순히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1070년대 초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불렀다. 청와대로 들어간 정주영에게 박 대통령은 다짜고짜로 조선소를 만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곧 준공될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의 소비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가 정주영에게 조선소 건설을 타진했지만 거절한 상태였다. 아니, 정 회장.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배짱도 없이 쉽게 포기해 버려요? 내 체면을 봐서라도 해봐야지. 어디 대통령 망신시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요? 박 대통령이 정주영에게 그렇게 노발대발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정주영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박 대통령이 담배를 권하자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면서 고민하던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왕 할 바에야 보란 듯이 해버리자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사실 조선소 건설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정주영에게 밀려 온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하면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국보 32)이 모셔져 있는 합천 해인사,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정혜결사(定慧結社)이후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순천 송광사, 그리고 부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 통도사를 꼽습니다. 이 가운데 양산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있는 절로 여기에 보물 제74호 국장생 석표(國長生 石標)가 눈에 띕니다. 장생을 흔히 장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따위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요. 통도사 국장생은 절의 경계표시와 절을 지키는 수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 경남 양산 통도사의 보물 제74호 국장생 석표(國長生 石標), 문화재청 제공 이 국장생 석표는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동남쪽 약 4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는 예전부터 국수를 잔치음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여름철이 되면 시원한 냉면을 즐깁니다. 그런데 여름철 별미로 냉면 말고도 비빔국수가 있지요. 비빔국수란 국물 없이 고기나 나물 따위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비벼 먹는 국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도 요즘처럼 비빔국수를 해먹었을까요? 조선조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보면 “골동면”이란 국수가 나옵니다. 골동면(骨董麵)은 궁중에서 먹었던 음식으로 메밀국수에 쇠고기, 돼지고기, 배, 버섯, 밤, 채소 같은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간장 양념에 비벼 먹었던 것입니다. 원래 골동(骨董)은 “오래되었거나 희귀한 옛날의 기구나 예술품”을 말합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이 한데 섞인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골동면에서의 “골동”은 바로 이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비빔국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빔밥의 또 다른 이름이 골동반인 것 역시 같은 까닭입니다. ▲ 조선시대의 비빔국수 "골동면"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골동면은 조선 후기 연중행사와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와 조선 말기에 나온 요리책 《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주한영국총영사 힐리어는 “왕비는 복도 아래로 달렸지만, 추적당해 쓰러졌다. 그녀의 암살자는 그녀의 가슴 위에 반복적으로 그의 칼로 그녀를 찔렀다.”고 기록했다. 베베르는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아, 찔러서 죽였다.”고 보고했다. 위는 동북아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이 쓰고 경인문화사가 펴낸 ≪미텔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나오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당시 외교문서를 확인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국모를 시해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주한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주범이며, 대원군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이 도와준 것이다. 조선은 왕이 무능하고 왕비가 폭정이 심해 백성들이 수탈을 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조선을 도와준 것이고, 명성황후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후 식민사관이 지배한 우리 역사는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명성황후를 뒤덮은 부정적인 시각은 대부분 일본과 식민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