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의 4대 명절은 설날, 단오, 한식, 한가위를 말한다. 이 밖에도 정월대보름, 초파일, 유두, 백중, 중양절, 동지도 명절로 지냈다. 하지만, 이제 유두와 백중(百中), 중양절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유두에 유두국수를 먹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유두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세시풍속은 이제 아쉽게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1) 물맞이하는 날 유두는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의 준말인데 이는 동방의 원기가 가장 왕성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액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다. 신라 때는 유두를 이두문자로 '소두'(머리 빗다), '수두'라 썼다. 수두란 머리의 옛말 마리를 써서 물마리라는 말인데 '물맞이'라는 뜻이다. 요즘도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 부른다. 유두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았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 유두의 풍속이 기록된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편 표지 유두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신라 때부터 명절로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13세기 고려 희종 때 학자 김극기의 ≪김거사집(金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음력으로 유월유두(6월15일)입니다. 우리 겨레가 즐겼던 4대 명절로는 설날, 단오, 한식, 한가위를 꼽는데 예전에는 이 날 말고도 정월대보름, 초파일, 유두, 백중, 동지도 명절로 지냈지요.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유두(流頭 : 음력 6월 15일)와 백중(百中 : 음력 7월 15일)이 무엇을 하는 날인지 잘 모릅니다. '유두날'은 유두국수를 먹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유두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유두는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에서 “류두”를 따서 이르는 말입니다. 유두는 산라 때부터 있던 풍속으로 동방의 가장 원기가 왕성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액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유두를 신라 때는 이두로 '소두'(머리 빗다), '수두'라고도 썼습니다. 수두란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로 '물맞이'라는 뜻입니다. 요즘도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부르지요. ▲ 퇴계 종가의 유두천신 제사 상차림(국립문화재연구소) 유두가 신라시대 때부터 있던 명절임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13세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찹쌀로 밥을 짓고 미역으로 국을 끓였다 / 질그릇에 나물반찬을 담았으니 / 비록 박하지만 정성이 어려 있다 /늙으신 어머니는 신(神)에게 절을 올려 기원하기를 / 아들의 수(壽)가 7~80세를 살게 해달라고 하였다(줄임) / 옛날 작은 몸으로 땅에 떨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 빙설(氷雪)보다 맑고 구슬보다 밝았었다 / 잡으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하시며 / 보자기 속에 아이 키우던 그 정이 가련도 하다 / 해마다 운명(運命)과 관상(觀相)을 들먹이며 / 평탄하게 살다가 공명(功名)을 이룬다고 하였다.” ▲ 아름다운 조각보(조선 말기 작품, 교토 고려미술관 제공) 이는 한말의 학자이자 사상가인 해학 이기(李沂, 1848~1909)의 문집인《해학유서(海鶴遺書)》에 나오는 시입니다. 여기서 해학 선생은 어머니가 자신을 보자기에 싸서 길렀다고 말하는데 오늘날의 흔해 빠진 나일론 보자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보자기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여 혼례 때의 청홍 보자기를 비롯하여 오대산 사고(史庫)의 책궤를 싸던 보자기 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세종 11년(1429) 때는 내섬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영남에는 수석도 많은데 / 嶠南饒水石 수승대가 그 이름 높았네 / 搜勝擅名佳 돌 드러나니 못은 옛날과 같고 / 石出潭因舊 노을 짙어도 길이 묻히지 않았네 / 霞濃逕不埋 일찍이 누가 삼동의 주인이던가 / 曾誰三洞主 이제 나는 하늘에 오른 것 같네 / 今我上淸懷 시가 이루어지자 곧 돌아가니 / 吟就歸去 그윽한 향기 낭떠러지에 방울지네 / 幽香滴斷崖 - 수승대(搜勝臺)에서 퇴계선생의 시를 차운함 황현 매천집 1권- ▲ 경남 거창군 수승대(搜勝臺)의 빼어난 절경 1 (문화재청 제공)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이 구연동인데 이곳에는 빼어난 경치의 수승대(搜勝臺)가 있습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했습니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견주기도 합니다. 이곳 수승대가 있는 구연동은 조선 중종 때 요수(樂水) 신권(愼權) 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기르던 곳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흔하던 것이 귀하게 돼버린 소목(小木)은 전통 한옥의 주거생활에 적합한 나무가구(木家具)를 이릅니다.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소목 하나 쯤은 여러분의 곁에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낸 우리는 우리의 훌륭한 장(欌)문화를 버리고 일본의 보잘 것 없는 차단스를 가져다 우리말처럼 씁니다. 또 골동품을 수집하는 외국인이 우리나라 시골에 가서 오래된 목가구와 양철 캐비닛을 맞바꾼 뒤 그 목가구를 외국에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목가구의 값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양철 캐비닛과 차단스에 주인 자리를 내준 뒤 이제야 서서히 그 값어치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 문갑과 책장이 하나가 된 문갑책장(인천공항) 목가구 가운데는 문갑책장이란 것도 있지요. 문갑책장은 안방의 보료 옆이나 창 밑에 두고 문서편지서류 따위의 개인 물건이나 일상용 기물들을 보관하는 가구인 문갑(文匣)과 서책과 두루마리 문서를 간직하는 가구인 책장(冊欌)이 같이 있는 목가구입니다. 대개 이층으로 되어 있는데 윗부분은 단문갑 형태이고, 아래는 여닫이문이 달린 책장이지요. 아래 문은 자물쇠를 풀고 양쪽으로 밀어 문을 끝 쪽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앞으로 이름 있는 더위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올 때로 와 사람을 괴롭게 할 것이다. 삼복의 찌는 더위도 닥치어 올 것이요, 소서(小暑)가 지나면 대서(大暑)도 닥치어 올 것이다. 이러한 심한 더위가 오고 보면 온갖 생식물(生植物)은 말할 것도 업거니와 사람 사람의 얼골에는 더위에 시달리어 아모 생기(生氣)가 없어 보인다. 거리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마치 사흘 굶은 사람 같으며 땀 씻기에 볼 일도 못 볼 지경인 사람의 입에서는 아이 더워! 더워 죽겠다! 소리만 연발할 뿐이다. 이는 1927년 7월 동광 제15호에 나오는 소서 풍경입니다.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등산이나 수영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한째로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든 소서(小暑)입니다. 이 무렵 모내기를 끝낸 벼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릴 때입니다. 7월의 늦은 모는 행인도 달려들고, 지나는 원님도 말에서 내려 돕는다.는 속담이 전하듯이 아직도 모내기를 못한 집에서는 바삐 길가는 행인이라도 도와서 모내기를 마쳐야 할 만큼 다급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지 않아 모를 내지 못하는 때는 기우제를 서둘러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강인도교 공사로 6대 건설사에 등극한 정주영은 그것에 만족할 사나이가 아니었다. 공사를 해나가면서 장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사들인 큰 덕을 봤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은 시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공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자재 시멘트는 1950년대 후반 무렵에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1958년을 보면 약 56만t의 시멘트가 필요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시멘트는 25만t에 그쳤으며, 1959년에도 45만t이 있어야 했지만 41만t에 그쳤다. 부족한 시멘트는 다른 나라에서 들여와야 했지만, 수입 시멘트는 관세가 붙어 그만큼 가격도 높아져 공사원가도 덩달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6‧25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인 복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시멘트 수요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전쟁 뒤여서 길을 건설하고, 다리를 놓고, 학교를 지어야만 했는데 시멘트가 없어 현장에선 일손을 멈추어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여기에 바로 정주영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게 된다. 시멘트가 모자라면 만들면 되지 않을까? 자동차, 건설에 이어 시멘트 사업을 벌이려는 정주영의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던 순간이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옛날이든 오늘이든 대부분의 화가가 한두 가지만 잘 그리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김홍도는 인물, 산수, 신선, 부처, 꽃, 과일, 새와 동물, 벌레, 물고기, 게 등 못 그리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절묘한 작품이라 그를 뛰어넘을 화가가 없다.” 이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이 제자였던 단원 김홍도에 대해 쓴 “단원기(檀園記)”입니다. 김홍도의 작품과 성품,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은 글이지요. ▲ 스승 강세황과 제자 김홍도가 함께 그린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호암미술관 조선시대 화가하면 누구나 단원 김홍도를 먼저 떠올리는데 김홍도는 원래 중인의 아들이어서 도화서 화원은 물론 화원으로서 출세하기도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세황은 같은 마을에 살던 어린 김홍도를 제자로 삼아 그림과 글을 가르쳤지요. 그뿐만 아니라 김홍도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그를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하였고, 그 덕분에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탄생 300돌이 되었던 강세황은 최초로 서양화법을 수용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시골에 가면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하얀 꽃이 눈에 띕니다. 덩굴이 다른 나뭇가지를 칭칭 감고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간다고 하여 “하늘타리”란 이름이 붙은 꽃입니다. 하늘타리는 7~8월에 흰꽃 또는 연한 노랑꽃이 피지요. 암수 따로 달리는 암수딴그루로 우리나라, 일본, 대만, 중국, 몽골 같은 곳에 자라며, 꽃말은 “좋은 소식” 입니다. ▲ 머리를 풀어헤친듯 하얀 하늘타리 들꽃 제주도에서는 두레기, 하늘레기라고 부르는데 액운을 물리치고, 잡귀를 막아준다고 하여 부엌이나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전하는 얘기로는 “귀신이 집에 들어오면 내 눈깔이 큰가 하늘타리가 큰가 재보다가 머리를 풀어헤친 듯 꽃을 피우는 하늘타리에게 지고 도망간다.”고 합니다. 웬만한 귀신들이 당해내지 못하는 이 하늘타리는 워낙 번식력이 왕성한 덩굴식물이어서 사람이 사는 집보다는 폐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머리를 산발한듯한 이 꽃을 폐가에서 밤에 보게 되면 소름이 돋을 만도 하겠지요. 참외보다 조금 작은 열매가 달린다고 “쥐참외”라고도 하고, 옛 이름으로는 하늘에 열리는 오이라 하여 “천과(天瓜)”, 누각을 잘 감고 오른다 하여 “괄루(括樓)”라고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18년 전인 1896년 오늘(7월 2일) 뜻있는 사람들은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처음 사교를 위한 모임으로 출발하여 민중계몽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근대적인 정당으로까지 발전하였지요. 1897년에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독립협회의 활동은 크게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고 의회제도의 도입과 중추원을 설립하여 민중대표를 정치에 참여하게 함은 물론 외국인의 금광채굴권과 정부정책 개입을 막으려는 국권수호운동을 하고자 한 것이지요. ▲ 친일행각을 벌인 서재필과 친일논조를 펼쳤던 독립신문(獨立新聞) 그러나 주진오 씨는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에서 “서재필이 주축이 된 독립협회가 국민 참정권을 주장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언론인 박선협 씨는 독립신문 창간을 주도한 서재필이 친일 행각을 벌였고 독립신문 역시 친일논조를 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비누 한 장도 스스로 만들 줄 모르면서 어떻게 독립정부를 갖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