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정지장군(鄭地將軍,1347~1391)은 고려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나 왜구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그는 1377년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이듬해에는 영광, 광주, 동복 등에서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그 뒤 장군은 해도원수가 되어 1년 동안 8차례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이긴바 있지요. 우왕14넌(1381년)에는 안주도원수로 요동정벌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용맹한 장수일뿐더러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조선왕조를 세우려하자 이를 저지하고 우왕을 복귀시키려다 발각되어 경주로 유배를 당합니다. 고려 말 명장수 정지장군이 입었던 실제 갑옷이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에 남아 있어 장군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게 됩니다. 보물 제336호로 지정된 정지장군환삼(鄭地將軍環衫)이라 부르는 이 갑옷은 장군의 경번갑(鏡幡甲)으로 이를 다른 말로는 철판 사슬갑옷 또는 미늘 갑옷, 미늘 사슬 갑옷이라고도 부르며 철판이 붙어있는 갑옷을 말합니다. 이 갑옷은 총 길이 70㎝, 가슴둘레 79㎝, 소매길이 30㎝로 세로 7.5∼8㎝, 가로 5∼8.5㎝의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망한 것 같았던 현대건설, 그리고 아우‧매제와 함께 펑펑 울었던 정주영은 고령교 복구공사의 시련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국내 최고의 난공사였던 고령교 공사의 실패를 곰곰이 새겨보니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장비 부족이 아니었던가?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일꾼들을 모으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일꾼 10명, 100명의 몫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 장비는 마음대로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장비를 갖고 있는 업체에 세를 주고 빌려 쓸 수는 있었지만, 비싼 세를 지불하면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결론적으로 고령교 공사의 실패는 경험이 모자라고 장비가 부족해서였을 뿐 실패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불감폭호 부감풍하(不敢暴虎 不敢馮河,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널 수 없다. 정주영은 당시 《시경(詩經)》의 이 문구가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따라서 현대건설의 가장 큰 과제는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비부족을 해결하는 정주영의 솜씨는 남달랐다. 마침 미군은 매주 못쓰게 된 장비를 민간업자에게
[그린경제/얼레빗=중국 북경 김영조 기자] 춘추시대(BC 770~ 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가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했다는 만리장성. 지구촌에 건설된 수많은 인공 구조물 가운데 가장 크다는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팔달령, 거용관, 사마대, 금산령 등 4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 단원들은 가장 인기 있는 그리고 유일하게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어 오르기가 편한 팔달령 만리장성(八達嶺 萬里長城)에 올랐다. 만리장성에 오른 우리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그 규모는 거대했다. 그리고 이를 보려고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 사람들로 오르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만리무덤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아랫부분을 파보면 해골이 나온다는 비극이 서린 구조물이다. 그를 생각하면 결코 규모에 입만 벌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우스개 소리로 달나라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이 보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팔달령 만리장성 ▲ 끝없는 만리장성의 모습 ▲ 중국의 상징 만리장성은 사시사철 방문객들로 늘 북새통이 된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산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토하며 가고 삼키며 오는 그 뜻이 깊어라 예나 지금이나 그 많은 떠도는 이들 등한히 놀기만 할뿐 그 까닭 돌이켜 보지 않네 이는 소소래사에 나오는 이자현의 시에 진각국사(1178~1234)가 답한 시입니다. 고려시대의 인물인 진각국자 혜심은 무의자시집, 無衣子詩集에 248수의 시를 남겼는데 세속을 떠나 깊은 산 속에서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높은 도의 경지를 읊은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그를 일컬어 최초의 승려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12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집에 머물면서 불경을 탐독하다가 어머니 사후 조계산에서 보조국사 지눌을 은사로 출가하였습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3호로 지정된 혜심고신제서(惠諶告身制書)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 제서(制書, 임금이 내리는 글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마름모꼴 꽃무늬가 있는 홍, 황, 백색 등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입니다. 혜심고신제서는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가운데 몇 점 남
[그린경제/얼레빗=북경 김영조 기자]어제는 연길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입성했다. 그리고 첫 답사지로 자금성을 돌아보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금성. 정식 명칭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지만 자금성(紫禁城)이라는 옛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황제가 사는 궁으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뜻으로 지어진 자금성. 엄청난 크기, 엄격한 대칭, 깎아지른 직선으로 지어진 자금성은 이름처럼 삼엄하다. 하지만 답답하다. ▲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 하나이며, 중요한 정치적 사건의 현장이었던 천안문 앞에서 ▲ 자금성 가운데 황제가 집무하던 태화전(太和殿) ▲ 태화전 오르는 곳에 세워진 대석조(大石雕), 길이 16.76m, 폭 3.07m, 깊이 1.7m, 무게 약 220톤의 어마어마한 돌에 9마리 용이 새겨져 황제를 상징한다. 자금성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경복궁을 생각한다. 경복궁은 전통적인 조선인의 미관과 세계관을 조화롭게 표현한 건축물로 검소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하지 않은 궁궐이다. 또 경복궁은 열린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궁궐로 이끌어오고, 어디에서나 문을 열면 그 문을 통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한 느낌을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 백두산 들머리에서 일단 셔틀버스를 탔다가 다시 곡예운전을 하는 봉고차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야 한다. ▲ 안개가 짙게 낀 백두산 오르는 길. 산 곳곳엔 들꽃이 피어있다. ▲ 천지는 10m 앞도 분간하지 못할만큼 안개가 짙게 서려있다. 그저 안개천지, 사람천지일뿐이다. ▲ 아쉬운 마음에 건너가지 말라는 팻말을 기념으로 비옷을 입은 채 사진을 찍었다 ▲ 장백폭포 올라가는 길엔 사람들이 그득하다. ▲ 천지에선 못 찍고 장백폭포 올라가는 길에서 모두가 함께 ▲ 웅장한 장백폭포 모습 1 ▲ 웅장한 장백폭포 모습 2 우리 겨레의 신령스러운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 북한 양강도(량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배달겨레라면 꼭 올라야 할 산이다. 그 산마루에는 천지(천지)가 있는데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한다. 면적 9.17㎢, 둘레 14.4km, 최대너비 3.6km, 평균 깊이 213.3m, 최대 깊이 384m, 수면 고도는 2,257m이다.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51호(지리 부문)로 지정되어 있다. 연길시에서 4시간 걸려 백두산 아래 마을 이도백하(二道白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하늘님네 오늘 그저 비 좀 내리게 해주소서 / 하늘님네 산신님네 이렇게 기도드리오니 / 오늘 해 전 많은 비를 맞고 가게 점지 하옵소서 / 하늘님네 만 인간이 모두 하늘님네 공을 드리오니 / 오늘 해 전 멍석발 같은 비가 쏟아지게 점지하소서. 금산농바우끄시기는 충남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어재마을을 중심으로 가까운 마을은 물론제원면 일대의 여러 마을까지 모여 비를 빌던 기우제 행사입니다. 지금은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만 예전에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를 하지 못하면 마을 부녀자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농바위를 끌어 내리는 농바우끄시기를 했습니다. 큰 바위를 끌어내려야 되기에 젊은 30대 이상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치러졌으며 남자들은 기우제에 필요한 짐만 날라다주고 직접 참석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런 제물을 차려 기우제를 마치고 나면 농바우끄시기 행사로 들어가는데 농바위는 어제리 시루봉 중턱에 있는 천연바위입니다. 크기는 3.7미터 세로 2.7미터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벼랑에 매달린 듯 달려있는데 생김새가 마치 장롱처럼 생겨 농바위라 이름이 붙었지요. 부녀자들은 농바우끄시기 노래를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영욕에 초연하여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지고 /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쫓는다 /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꼬?”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은 생을 마치던 날까지 이 시를 즐겨 붓글씨로 썼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불나비처럼 덧없는 영화를 쫓거나 수리와 같이 눈앞의 썩은 이익만을 탐내는 무리를 질타하는 내용이지만 사실상 일제강점기 때는 친일파로 이득을 얻던 사람들을 나무라는 것이요, 해방 뒤에는 또 다시 친미파로 돌아서서 민족의 자존심과 분단을 조장하는 무리들을 꼬집는 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범 김구 (1876. 7. 11~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맨 앞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뛰다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게 됩니다. 귀국 뒤에도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연변에서 사흘째다. 오늘은 느긋했던 어제와 달리 조금 서둘러 조선족예술단원 들을 만나러 나섰다. 조선족예술단은 전통예술을 직업으로 삼는 프로들이라고 한다. 이 조선족예술단은 예전 전통음악학회 일행이 처음 들른 때에 견주면 많이 발전했다고 서한범 회장은 회고한다. 조선족예술단에 들어서니 비교적 젊은 단장과 부단장이 반갑게 맞는다. 역시 한국전통음악학회는 조선족예술단에 거문고와 장구 그리고 단원들이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기탁했다. ▲ 조선족예술단 강대화 외 17명의 화려한 군무 무운(舞韻) ▲ 여성독창 도라지 연가를 부르는 조선족예술단 김소연 ▲ 조선족예술단 개량해금(채련화), 25현가야금(장위령), 고음젓대(안예화)의 민악3중주 그렇게 간단한 사전 행사가 끝난 뒤 조선족예술단과 한국전통음악학회의 전통예술교류가 시작되었다. 먼저 조선족예술단 단원들의 순서다. 강대화 외 17명이 화려한 군무를 펼친다. 무운(舞韻)의 이름으로 펼치는 무용 공연에 한국서 온 청중들은 눈을 떼지 못한다. 이어서 고운 한복 차림의 김소연 씨가 나와 여성독창 도라지 연가를 불렀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한동안 넋을 잃는데 이번엔
[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를 회장으로 한 한국전통음악학회는 중국 연변의 민족음악인들과 함께 끈끈한 교류를 무려 23해나 이어왔다. 1990년 한ㆍ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던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민족의 전통소리를 배우고자 한국 《국립국악원》으로 유학을 온 연변예술대학 전화자 교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한중전통음악교류는 이제 2014년 제16회를 맞는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 있는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공연장에서는 어제 6월 25일 오후 3시 30분 드디어 제16회 행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연변예술대학 김성삼 교수의 사회로 열린 여는 행사는 연변대학교 예술학원(한국의 단과대학) 신호 원장의 따뜻한 환영사가 있었고, 이어서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의 축사 그리고 연변에술대학 전화자 교수의 축사가 있었다. ▲ 환영사를 하는 연변예술대 신호 원장, 인사말씀을 하는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 축사를 하는 연변예술대 전화자 교수(왼쪽부터) ▲ 한국에서 간 교류단은 가야금,거문고, 장구, 피리 등을 연변예술대에 기증했다. 인사말 순서가 끝난 뒤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한국에서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