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중국 연길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열기가 확 느껴진다. 서울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느껴지지 않았는데 연길은 한여름 같다. 한국전통음악회(회장 서한범)회원 50여명은 2014년 한중 학술 및 실연(實演) 교류회를 위해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중국 연길을 찾았다. 올해로 23년째 한중 전통음악교류를 맡아오고 있는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는 한중 수교 이전인 1991년 7월부터 시작되어 2000년부터는 해마다 교류회를 가져왔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장시 죽의장막이라는 휘장을 뚫고 중국연길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과 교류의 물꼬를 텄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감회가 새롭다 고 했다. ▲ 한국전통음악회 한중교류회 공연과 학술회의를 위해 연길공항에 내린 단원들과 연길에서 마중나온 사람들 이번 전통음악교류회 팀의 연길 방문은 방문 이틀째날 배뱅이굿의 서도소리 박준영, 방아타령 가야금 병창 정경옥, 임종복 등의 공연과 창작국악극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서한범 교수, 단소 취법 향상 조성보 교수 등 학술교류 등을 열 계획이며 백두산 등정도 포함되어 있다. 일정은 24일부터 한국전통음악학회 공연을 시작하여 30일 귀국 예정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고달픈 피난살이에서도 우리나라의 장차 주인공인 청소년학도들은 학구의 정열을 잃지 않고 있다. 기다리던 환도도 이번 해가 가기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움을 알아 임시수도 부산에 모인 서울의 각 피난학교들은 겨울 날 준비를 급작스럽게하여 대학부터 국민학교에 이르기까지 해변가 또는 산비탈 등에 터를 잡아 천막 또는 판자로 가교사를 지어 지낸다. 남쪽이라 겨울 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 혜택을 받아가며 수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 1951년 12월 16일 자유신문 기사 "부산 피난학교 실태" 이는 1951년 12월 16일 자유신문 기사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년 6개월이 지나가고 있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날은 춥고 먹을 것은 떨어진데다가 서울로 돌아가 날을 기약 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각 급 학교들은 수업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 눈물겹습니다. 한국전쟁은 인명살상, 건물파괴, 전쟁고아, 배고픔, 폐허더미, 높은 실업률, 이념갈등, 혼란과 같은 말을 쏟아놓아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 겨레의 가장 무서운 비극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손실 말고도 나라가 분단되는 쓰라린 아픔의 사건이었지요. 그런데 위 기사가 있기 한 달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비상대용식으로 제일 만히 먹는 감자는 이달부터 일제히 심기 시작할 터인데 특히 미국 종자로 720톤이 불일간 조선에 오게 되어 이것을 각부에 배부할 터인데 품질이 조흘 뿐더러 거두어지는 수량도 만허서 재래종보다 훨씬 많은 추수를 예상케 되는데 6,7월에 넉넉히 캐어 먹도록 이것 역시 부지런한 손질을 해야만 한다고 한다.” ▲ 감자와 감자전 이는 1946년 4월 22일치 자유신문에 나오는 “농토를 지키자, 건국의 정열로 증산에 보리, 감자 대용작도 전력”이라는 기사에 나오는 글로 당시 표기를 그대로 옮겨보았습니다. 엊그제는 하지였습니다만 위 기사처럼 4월 중순쯤에 감자를 심어 하지 무렵에 캐기에 “하지감자”라고 불리는 감자를 당시에는 비상대용식으로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감자하면 특히 포테이토칩이 떠오르는데 이 당시는 굵직한 미국산 종자를 들여다 심었고 지금도 알이 굵은 이런 감자를 대형할인점에서는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지요. 감자가 제철인 요즈음 어떻게 해 먹어야 감자의 참맛을 느낄까요? 더러는 갓 캐어낸 감자를 박박 씻어서 가마솥에 넣어 푹 쪄내 열무김치와 먹는 게 제격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부추나 애호박을 송송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새집에 가서 잠이나 잘 잤느냐. 병풍을 보내니 몸조리 잘하고 밥에 나물을 넣어 먹어라. 섭섭 무료하기 가이없어 하노라.” 이는 사랑하는 고명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아버지 현종임금의 한글 편지입니다. 현종에게는 외아들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의 세공주가 있었는데 막내인 명안공주 위로 두 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비슷한 이름으로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와 다름)는 유달리 명안공주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 현종임금이 고명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명안공주(1664∼1687) 이름은 온희(溫姬)이며 아버지 현종은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임금)의 아들로 그가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갔을 때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예론 논쟁에 휩싸여 34살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재위 15년간을 정쟁으로 보내야 했던 현종은 시름 속의 나날 속에서도 명안공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명성왕후와 오라버니 숙종도 명안공주를 몹시 아꼈으며 이들이 주고받은 한글편지에서 그 오붓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 비단과 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모두가 반대하던 건설업, 정주영이 하면 성공한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던 정주영의 건설사업은 어려움 속에서도 착착 성공에의 길로 한발자국씩 접어드는 듯했다. 처음 얼마간은 미군의 절대적인 믿음 속에 미군 건설 공사를 독점해가면서 승승장구 하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정주영 앞에 또 하나의 시련의 강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3년 6월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미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주영은 미군 공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부의 전후 복구공사에 뛰어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현대건설은 조폐공사가 발주한 고령교 공사를 수주했다. 물깊이가 무려 10m나 되는 곳에 열세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60m짜리 다리 몸체를 놓아야 하는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공사였다. 2년의 공사기간에 계약금액 5457만환이었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로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정부가 시급하게 놓아야만 했으며, 그때까지 정부 발주 공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기에 정주영은 복구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무작정 공사를 시작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 전 시미즈(淸水)건설 조선지점에서 풍부한 교량공사시공 경험을 갖
[그림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하지 날부터 처서까지 두 달 동안 무서운 더위는 계속된다. 춘분부터 길어가던 해도 이제 길대로 길어 하지를 고비로 다시 짧아드는데 긴긴해 시퍼런 하늘에는 산봉우리 구름이요, 삼복을 앞두고 하루해가 세어간다. 피서까진 엄두도 못하지만 망중에 짬을 타서 가까운 강과 녹음을 찾아가는 도시민들의 간소한 여름차림도 있어야 하겠지만 보리타작에 바쁠 농부들의 등에는 멱 감은 듯 구슬땀이 흐르고 있으려니 강한기력으로 삼복을 맞이하자.” 위는1950년 6월 22일치 자유신문의 “하지” 기사입니다.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열 번째에 해당하는 하지(夏至)입니다. 하지가 지나면 모심기가 늦어지기 때문에 서둘러 모내기를 해야 했는데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지요. 조선시대에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이지요. 기우제의 유형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내 나이 어렸을 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코쿨 앞에 마주 앉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말하자면, 달 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은하수가의 견우직녀 이야기, 천태산 마구 할멈 이야기, 구미호 이야기, 장사 이야기, 신선 이야기 그리고 유충렬전, 조웅전, 장화홍련전, 고담책 이야기 이 밖에도 슬프기로는 타박녀의 이야기가 으뜸이었다. 영영 가버린 어머니를 찾아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 ▲ 강원도에서 방안 조명과 난방으로 쓰였던 코쿨(재현, 김동명 생가) 이는 초허 김동명의 수필 “어머니”에 나오는 한 부분으로 여기서 “코쿨”이라는 말을 생소하다고 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겨울철 활동이 여의치 않는 추운 지방에서는 겹집을 짓고 살았는데 외양간·방아실·곳간과 헛간은 물론 보통 부엌에 있는 숙화(宿火, 불씨 보관하는 곳)·화덕·아궁이·부뚜막 따위도 함께 만들어 놓았지요. 특히 이런 시설 가운데 김동명의 수필에서는 방안에 코쿨도 해놓았다고 하네요. 코쿨은 방귀퉁이에 설치된 것인데 소나무 옹이를(광솔) 잘게 쪼개어 등잔불 대용으로 불을 밝혔으며, 난방을 겸하던 도구의 하나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
[그림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영건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지은 각종 건축물의 공사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일종의 건축공사 보고서입니다. 이 책에는 집을 지을 때 나무는 어디서 가져오고 단청 물감은 어떻게 구해오며 벽돌 굽는 장인은 누구였는지와 같은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지요. 뿐만 아니라 궁궐의 왕과 왕비 또는 대비가 거처하는 침전의 도배에 관한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바닥은 장지에 기름을 먹인 장판지로 바르고 사방의 벽은 백능화지로 도배하여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천장은 봄을 상징하는 푸른빛을 쓴 청능화지로 도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운현궁 노락당의 청능화 무늬+용무늬(왼쪽), 덕수궁 중명당의 용봉무늬 도배지 당시 사용한 문양지의 종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책자의 표지에 자주 사용되는 능화문양의 종류가 여럿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청능화지와 백능화지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백능화지는 운모가루를 백색 물감으로 삼아 능화문을 찍어내는 것으로 은은함을 주는 멋스러운 종이입니다. 청능화지는 대원군의 집인 운현궁에서 쓰였지요. 이 밖에도 용봉지가 있는데 덕수궁의 중명당에 쓰였던 것으로 용무늬로 둥글게 꾸민 것과 봉황의 모습으로 꾸며 동그랗게 표현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군산항은 쌀 수탈의 전진기지로 총독부가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습니다. 1930년대 통계를 보면 군산의 토지 가운데 80%가 일본인 소유였고 옥구지방(예전 군산을 둘러싼 쌀농사지역, 현재는 군산에 통합)은 농경지의 60%가 일본인이 지주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농장을 세웠는데 입지조건을 보면 철도역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수리조합을 만들어 저수지와 수리시설을 갖추었지요. 물론 수리시설은 조선의 농업 발전을 위한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증산된 쌀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 군산항의 쌀 수탈현황 도표(군산근대역사박물관) 총독부의 수리조합사업은 1920년~34년 사이에 산미증식계획의 중심사업으로 펼쳐나갔는데 이는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농업 정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수리조합은 전국적으로 187곳에 설치되었고 이는 1910년 까지 14개소에 불과하던 것에 견주면 실로 엄청남 수리시설확충이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수리시설을 이용하여 쌀증산이 계획대로 이뤄졌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군산 나카이정미소(中井精米所)에서 쌀을 고르던 미선공(米選工) 50명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하늘 선녀가 어느 해 젖가슴 한쪽을 잃어버렸는데 天女何年一乳亡 오늘에 우연히 문방구점에 떨어졌다네 今日偶然落文房 나이어린 서생들이 앞 다퉈 손으로 어루만지니 少年書生爭手撫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눈물만 주르륵 흘리네 不勝羞愧淚滂滂 ▲ 국립중앙박물관 "백자무릎모양연적" 이름 모를 한 시인이 쓴 “연적(硯滴)”에 관한 한시입니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무릎모양연적”을 보고 쓴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모양연적”을 보고 쓴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연적은 원래 벼루에 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쓰임새로 썼던 것이라 젊은 서생들의 손길에 연적 곧 선녀의 젖가슴이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 묘사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자무릎모양연적”은 아무런 그림도, 무늬도 없는 그야말로 순백의 백자입니다. 그러나 백자달항아리가 아무런 그림도 조각도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이 백자연적도 보는 이를 한참 동안 붙들어두는 매력이 있습니다. 위쪽에는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 왼쪽 약간 윗부분의 튀어나온 부분이 물을 벼루에 붓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