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쩌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은 건설이었는지도 모른다. 중동건설 붐을 타면서 봇물 터지듯 했던 해외건설 수주는 당시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2014년에도 여전히 건설회사 도급순위 1위를 달리는 현대건설은 직원들이 한국에는 경쟁자가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미 중동 건설 붐 때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현대, 그런 정주영도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흔히 정주영은 롤러코스트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만큼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런 롤러코스트 삶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건설사업은 자동차 수리비를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시작되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을 목격했다.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고작 몇 백 원을 받아 가는데, 건설업자들은 건설 공사비로 몇 만원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정주영은 분야가 다르지만 우리도 일을 죽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안 되겠다. 이왕이면 나도 큰돈을 받는 일을 해야지.라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함께 사업을 하는 친구는 물론 식구들도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건설업을 하려면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문익점은 원에 머물다가 1366년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 6알을 구해 붓두껍에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 이는 위인전에서 우리가 읽던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에 관한 내용이며, 어렸을 때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문익점은 하나의 산업 스파이인 셈입니다. 정말 문익점은 산업 스파이였을까요? ▲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 가운데 길쌈, 국립중앙박물관,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것은 조선 의생활의 혁명이었다. 그런데 조선 《태조실록》 7년(1398년) 6월 13일치 문익점 졸기(卒記,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삶에 대한 기록)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문익점은 계품사인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그 씨 십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그런가 하면 《고려사》의 기록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같은 공식적인 기록에는 산업 스파이 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물론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시비를 겪고 나서 몸은 지쳤고 是非閱來身倦 영욕을 버린 뒤라 마음은 비었다. 榮辱遣後心空 사람 없는 맑은 밤 문 닫고 누우니 閉戶無人淸夜 들려오는 저 시냇가 솔바람 소리. 臥聽溪上松風 ▲ 솔바람 소리로 마음을 비울까?(그림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위는 조선 후기의 시인 홍세태(洪世泰, 1653~1725)의 한시 “우음(偶吟, 그냥 한번 읊어보다)”입니다. 홍세태는 아버지가 무관이었지만, 어머니 강릉 유씨가 종이었기 때문에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도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홍세태를 본 사람들이 돈을 모아 속량(贖良,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일)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홍세태는 5살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7~8살에는 이미 글을 지었는데 속량만 되었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어릴 때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았던 홍세태는 중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로 이름을 떨치려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문인 김창협과 김창흡, 이규명 같은 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내는 것은 물론 많은 중인들과도 교류했지요. 홍세태는 역과에 급제한 뒤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남녀 사이 자유스러운 접촉을 금하였던 관습 또는 제도를 “내외(內外)”라 했습니다. 내외의 기원은 유교 경전 《예기(禮記)》 내측편(內則篇)에 “예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궁실을 지을 때 내외를 구별하여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 거처하고, 궁문을 깊고 굳게 하여 남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여자는 임의로 나가지 않으며,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한 예론에서 비롯되었지요. ▲ 《가례도감의궤》의 너울을 쓴 상궁 (왼쪽), 신윤복 <풍속도 화첩>의 장옷 쓴 여인 이 내외법에 따라 여성들은 바깥나들이를 쉽게 할 수도 없었지만 꼭 해야 할 때는 내외용 쓰개를 써야만 했습니다. 그 종류를 보면 얇은 검정 깁으로 만든 너울[羅兀], 치마와 같은 것으로 끈이 달려 있는 쓰개치마,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로 겉감은 초록색, 안감은 자주색을 쓴 장옷, 방한을 겸한 내외용 쓰개 천의, 비나 볕을 피하기 위한 삿갓, 주로 기녀들이 바깥나들이용으로 머리에 썼던 전모 따위가 있었습니다. 쓰개 가운데는 주로 장옷과 쓰개치마가 많이 쓰였는데 조선 후기 화가 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1987년 온 나라에서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된 날입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시위 도중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죽은 것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지요.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진 민주주의가 진일보한 항쟁의 시작일이 1987년 오늘인 것입니다. 또 1926년 오늘은 “6·10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이 일어난 날입니다. 그해 4월 26일 승하한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에 대한 온 백성의 애도는 나라 없는 겨레의 설움을 대변해 주었는데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장례날을 기해 학생들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 1926년 “6·10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 동아일보 제1회 공판 기사기사 제목을 보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은 누구나 아는 것"이러고 썼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전 경찰과 일본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켰지만 이날 오전 8시 30분무렵 황제의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고려는 모시와 삼을 스스로 심어 많은 사람들이 베옷을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시라고 하는데 깨끗하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임금과 귀족 그리고 신하가 다 입는다. 이는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고려사절요》에는 모시실이 너무 가늘어서 매미 날개처럼 투명하게 보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시는 예부터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여름 옷감의 대명사입니다. 모시에 관한 오래된 기록으로는 5세기 무렵 가야시대에 발굴된 직물 48점 가운데 대마직물이 30점이고 모시가 17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모시는 옷을 만들어 입는다기 보다는 금속물에 부착하는 띠나 끈으로 썼으며 통일신라시대 무렵부터 다양한 모시옷이 선을 보입니다. 이러한 모시옷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한성에 저포전이 생길 정도로 활발한 생산이 이뤄졌는데 특히 예종 때에는 한산지역의 모시를 토산품 공물로 지정할 정도로 모시의 거래가 활발했습니다. ▲ 아름다운 모시 옷감(왼쪽), 무형문화재 보유자 방연옥 명인이 모시 옷감을 짜고 있다. 이름난 모시 산지로는 충청도 저산팔읍이 유명한데 이는 곧 서천군의 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 망종입니다. 망종(芒種)이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라는 속담이 있는 망종 무렵은 보리를 베고 논에 모를 심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고 할 만큼 한해 가운데 가장 바쁜 철입니다. ▲ 망종, 이 무렵엔 보리가 익어 보리개떡을 해먹습니다. (사진작가 공영춘 제공) 제주도에서는 망종날 풋보리 이삭을 뜯어서 손으로 비벼 보리알을 모은 뒤 솥에 볶아서 맷돌에 갈아 체로 쳐 그 보릿가루로 죽을 끓여 먹으면 여름에 보리밥을 먹고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또 전남 지역에서는 이날 ‘보리그스름(보리그을음)’이라 하여 풋보리를 베어다 그을음을 해서 먹으면 이듬해 보리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또한, 이날 보리를 밤이슬에 맞혔다가 그 다음날 먹는 곳도 있는데 허리 아픈 데가 좋아지며, 그해에 병이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믿었지요. 특히 이때쯤에는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또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햇보리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며 차린 아도비서비스 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 앉아 나오느니 한 숨 뿐이었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정주영은 아니었다. 망연자실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얼핏 참외장수 아주머니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던 거지아이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낡은 하숙집 벽을 타고 살고자 끊임없이 기어오르던 빈대도 생각이 났다. 거지아이는 어떤 희망보다는 그저 참외 하나 얻어먹고 순간의 배고픔을 참으려 했고, 빈대도 그저 본능적으로 위로, 위로만 올라가는 것 말고는 무슨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거지아이와 빈대가 지금의 정주영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절망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거지아이와 빈대에 견주면 정주영은 분명히 절망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예전에 돈을 꾸었던 오 영감을 부리나케 찾아갔다. 영감님,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감님 빚은 못 갚을 테고 그러면 영감님의 평생 업에 누가 되는 것 아닙니까? 빚을 갚도록 돈을 더 빌려주셔야겠습니다. 이건 숫제 협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얼마전 숭례문 복원 과정에서 대목장이 금강송을 빼돌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목장이 무엇일까요? 나무를 다루어 집짓는 일이나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목수 또는 목장(木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장에는 크게 둘로 나누어 대목장과 소목장이 있습니다. ▲ 대목장은 다포집의 포를 맞추기도 한다.(왼쪽), 농 앞판을 짜는 소목장(문화재청 제공) 먼저 대목장(大木匠)은 큰 건물 곧 궁궐이나 절 그리고 집을 짓는 책임자를 말합니다. 대목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해 전통을 잇도록 하지요. 목조건물을 짓는 데는 목수 외에 기와장이(蓋匠)흙벽장이(이장泥匠)단청장(丹靑匠, 가칠장假漆匠)석수(石手) 등과 긴밀한 협조가 있어야 하지만, 대목장이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까닭에 건축에 있어서 총책임자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집 지을 때 문짝반자난간을 만들고 장롱 따위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小木匠)도 있습니다. 소목장 역시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지요. 예전에는 궁궐이나 절을 짓는 일이 아주 중요했기에 이 목장들에게 벼슬도 내렸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도시행정을 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철마다 절기마다 풍년이나 무병장수 또는 액막이 같은 뜻을 담아 특색 있는 떡을 해먹으며 한해를 지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떡을 보면 봄엔 진달래꽃 따위 꽃잎을 곁들인 화전을 해먹었고, 여름엔 술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 증편을 먹었으며, 가을엔 햅쌀로 송편을 빚어 제사도 드리고 함께 나눠먹었지요. 또 겨울엔 떡 옹심이를 넣은 팥죽과 가래떡을 뽑아 떡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따라 다양한 떡들이 있었는데 도행병이란 떡은 강원도에서 먹는 떡으로 복숭아 즙과 살구 즙을 넣고 버무려 시루에 쪄서 먹으며, 평안도에서는 모시조개 모양으로 만든 조개송편, 함경도에서는 부드럽고 말랑해서 어린이나 노인들이 먹기 좋은 오그랑떡도 있지요. 또 개성지방에서는 설음식으로 조랭이 떡국을 해먹으며, 제주도 떡으로 함경도나 평안도에서도 먹었던 달떡 같은 것도 있습니다. ▲ 뜨거울 때 맛있는 제주도 오메기떡(나우리떡집 제공) 그밖에 제주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메기떡도 있지요. 오메기떡은 차조가루를 익반죽을 하여 도넛 모양으로 빚어 삶아 고물을 묻힌 것인데 최근 방송을 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척박한 땅 제주도에서 특히 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