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하루는 정사를 마치고 인조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술자리가 벌어졌을 때입니다. 이때 조선 중기의 문신 오윤겸(吳允謙, 1559년 ~ 1636년)이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엎드려 울었지요. 이에 임금이 무슨 까닭인지 묻자 나라가 망하려고 하여서 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재차 임금이 왜 나라가 망하느냐고 물었고, 오윤겸은 신이 사사로운 관계의 사람을 으뜸 초사(初仕, 처음으로 벼슬하는 사람)후보로 추천하였는데 전하께서 누구냐고 물으셨을 때 사사로운 관계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낙점하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신과의 인연에 구애되어 바른 도리로 신하를 꾸짖지 않으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요. ▲ 죄의정 오윤겸, 나라가 망할 것 같다며 임금 앞에 엎드려 울다(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오윤겸은 벼슬자리를 사사로이 줄 수가 없는데도 득(得, 욕심을 내어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에 가려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에 자신을 질책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영의정까지 지내면서도 끝없이 스스로 채찍을 가했던 그는 마지막 벼슬자리를 물러나면서 임금에게 간곡히 아룁니다. 사무를 밝게 살피는 것을 능사로 삼지 말며, 한 시대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장장채승(長長彩繩:오색의 비단실로 꼰 긴 동아줄) 그넷줄 휘늘어진 벽도(碧桃, 선경[仙境]에 있다는 전설상의 복숭아)까지 휘휘 칭칭 감어 매고 섬섬옥수(纖纖玉手) 번듯 들어 양 그넷줄을 갈라 잡고 선뜻 올라 발 굴러 한 번을 툭 구르니 앞이 번 듯 높았네. 두 번을 구르니 뒤가 점점 멀었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은 올을 따라서 흔들 발밑에 나는 티끌은 바람을 쫓아서 일어나고 해당화 그늘 속의 이리 가고 저리 갈제” ▲ 그네뛰기(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 구절은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가 그네 타는 장면인데, 그네뛰기는 단옷날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단오를 4대 명절로 즐겼지만 이제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단오의 이름과 유래 단오는 단오절, 단옷날, 천중절(天中節), 포절(蒲節 : 창포의 날), 단양(端陽), 중오절(重午節, 重五節)이라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오(午)'는 다섯으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음력 5월 5일을 말하는데, 우리 겨레는 이날을 양기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우리 겨레 명절의 하나인 단오입니다. 예전엔 단오를 맞아 여성들은 그네뛰기를 하고 남성들은 씨름하는 것이 대표적인 민속놀이였습니다.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에 부녀자들이 그네 뛰는 모습이 나오지요. 그네뛰기를 큰 행사로 할 때는 통나무를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묶은 다음 그넷줄을 메는 '땅그네'로 했습니다. 종목은 '높이뛰기', 그네 앞에 장대를 세우고, 장대에 방울을 달아놓아 발로 차도록 하는 '방울차기', 두 사람이 마주 올라타고 뛰는 '쌍그네뛰기'가 있었습니다. ▲ 단오의 민속놀이 그네뛰기(그림 이무성 화백), 김홍도의 씨름도(오른족) 또 남성들의 놀이 씨름 종류는 왼씨름, 오른씨름, 띠씨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쥐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샅바를 잡는데 이것을 바른씨름(오른씨름)이라 하며, 경기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주로 했습니다. 손잡는 것이 반대인 것을 왼씨름이라 하는데 함경, 평안, 황해, 경상, 강원도 등에서 했고, 띠씨름은 허리에다 띠를 매어 서로 잡고 하는 씨름인데 '허리씨름' 또는 '통씨름'이라 하며 주로 충청도에서 했지요. 이렇게 따로 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의 꿈같은 첫 사업, 쌀가게는 승승장구했다. 성실하게 운영한 덕에 단골손님은 나날이 늘어갔고 가게는 번창했다. 운명일 수도 있는 첫 사업 쌀가게는 보배였다. 그러나 그런 달콤한 세월도 두해 남짓, 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운명이 그 앞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이 아시아를 송두리째 먹기 위한 침략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1937년 7월7일부터 노구교사건이라 하여 중국군과의 충돌을 거짓으로 꾸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곧바로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내렸다.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 등을 거둬들이고, 군수품 통제를 시작으로 정미소까지 통제했다. 1939년 12월 쌀 배급제가 시작됐고, 전국의 쌀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는 농민들이 지은 곡식을 수탈해 일본군에 보내고, 일본 본토로 가져가기 위한 수작이었다. 정주영도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정리해야만 했다. 쌀가게를 정리한 뒤 그의 손에 떨어진 돈은 1000여 원 남짓이었다. 쌀가게를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이 돈으로 아버지께 논 2000평을 사드렸다. 가출 네 번 만에 첫 효도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고향에 오래 머물지 않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 민요 가운데 농부가가 있지요. 노랫말은 부르는 이에 따라 다양한데 어~~화 농부님 서마지기 논빼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니가 무슨 반달이야 초생달이 반달이로다.라는 노래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아마도 이 농부가를 불렀던 이는 수령이나 양반들에게 다 빼앗기고 남은 논이 반달만큼 남았나 봅니다. 얼마나 착취를 당했으면 농사지을 땅이 반달만큼 남았는지 기가 막힐 일이겠지만 그래도 농부는 '노래 한토막'으로 마음을 달랩니다. ▲ 단원 김홍도의 춘일우경(春日牛耕, 봄날 논 가는 풍경), 국립중앙박물관 그런가 하면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어화~어화 여어루 상~사~듸이여 우리남원 사판이다 어이하여 사판인고 부귀와 임금은 농판이요 장천태수는 두판이요. 육방관속은 먹을판 났으니 우리 백성들 죽을판이로다 . 여기서 사판이란 사판(死板) 곧 죽을 판국을 말합니다. 흔히 이판사판이다.라고 할 때 쓰는 사판과 같은 말이지요. 또 농판은 바보판을 이르는 전라도 사투리입니다.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향한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백성이 살판이 아니라 죽을판이 되는 것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맨 처음 바다 사고는 태조 4년(1395) 6월 경상도 조운선(漕運船, 현물로 거두어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배로 서울까지 옮기는 배) 16척이 바람으로 침몰한 사건입니다. 이후 조운선이 바다에 침몰한 사고는 조선 중기(中期)인 16~17세기에도 해마다 생겼는데 특히 영조 4년(1728) 7월에 40여척의 경강선(京江船, 한강에 띄었던 배)이 침몰하여 세곡 47,000석이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 조선시대 조운선 모형(국립해양문화연구소 제공) 조선시대 가장 큰 해난사고는 태종 3년(1403) 5월 5일에 일어났는데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바다에서 침몰되어, 천여 명의 조군(漕軍, 조운선에 타는 뱃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세곡 만여 석이 침수되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할 때 살아난 한 사람이 도망치다 잡혔지요. 그래서 도망친 까닭을 물으니,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얼마나 조운선을 타는 것이 위험하고 힘들었으면 조군이 도망쳤을까요? 태종임금이 이를 듣고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萬人)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일본 교토에 가면 “고려미술관”이 있습니다. 고려미술관은 정조문 선생이 1988년 10월 25일에 설립한 곳이지요. 선생은 40여 년 동안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개인 재산을 들여,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 1,700점을 되찾아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것입니다. 1,700점의 우리 문화재를 되찾은 것, 이것은 정조문 선생 방식의 치열한 ‘독립투쟁’이었습니다. 문화재 한 점 한 점이 선생에게는 “조선” 그 자체였기에 문화재들이 일본인들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의 화각삼층장(華角三層欌) 이 고려미술관에는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을 꼽는다면 단연코 “화각삼층장(華角三層欌)”입니다. 화각삼층장은 화각공예로 빚은 삼층장인데 화각공예는 소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만들어서 그림을 그린 뒤에, 그림이 소뿔에 비쳐 보이도록 뒤집어 목공예품에 붙여 치장하는 전통 공예 기법입니다. 소뿔의 뒷면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림이 벗겨지지도 않고 은은한 소뿔의 광택도 즐길 수 있습니다. 화각공예는 목공예품의 표면을 꾸민다는 점에서 보면 나전칠기공예와 비슷하지요. 다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不識騎牛好(불식기우호) 소 타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은 몰랐는데, 今因無馬知(금인무마지) 나 다닐 말이 없는 까닭에 이제야 알았네. 夕陽芳草路(석양방초로) 해거름 저녁 무렵 풀 향기 가득한 들길, 春日共遲遲(춘일공지지) 나른한 봄날 저무는 해도 함께 느릿느릿.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지은 偶吟(우음, 그냥 한번 읊어보다)이란 한시입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 유유자적한 모습이 보이는 전원시이지요. 저 멀리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땅거미를 타고 풀 향기가 솔솔 올라오는 들길을 소를 타고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신선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 소를 타는 것은 세종 때 명재상 맹사성을 연상케 합니다. ▲ 학포 양팽손의 산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양팽손은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151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습니다. 1519년 교리(校埋) 자리에 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는데 조광조를 위하여 소두(疏頭, 연명(連名)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올린 이름)로서 항소하였다가 삭탈관직 되어 고향인 능주로 내려왔지요. 조광조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아버지 손에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다시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뒤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굳은 결심으로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또 다시 마음은 서울에 가 있었다. 흉년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는 농촌현실은 희망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정주영은 송전소학교 동창 오인보와 함께 기어이 4번째의 가출로 서울 땅을 밟았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일거리가 많다는 인천 부둣가에 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쉼 없이 짐을 지어 날랐다. 그러나 이도 밥 세 끼를 먹기에 급급한 형편없는 수입이었다. 하루 품삯은 고작 50전으로 먹고 자는데 드는 돈을 빼면 20전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는 합숙소는 빈대가 들끓어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나서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은 자야했기에 할 수 없이 그는 식탁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빈대는 식탁 위의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정주영은 생각 끝에 식탁의 네 다리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놓고 잠을 잤다. 그런 방법으로도 곤히 잘 수 있었던 건 이틀에 불과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중종 때 곧 16세기는 가뭄과 홍수, 역병, 병충해 따위의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났고 이때문에 오랜 흉년으로 이어졌습니다. 중종 15~23년에는 해마다 두세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았지요. 반대로 20~21년에는 홍수가 잦아서 평안도와 황해도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종 19~22년에는 전염병도 온 나라를 휩쓸었는데, 평안도와 충청도, 함경도 같은 곳이 더욱 심각했지요. 중종 21년에는 병충해 피해가 있었는데, 16세기 가운데 가장 큰 피해였습니다. ▲ 극심한 흉년에 중종은 고심하지만 모반의 무리도 생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재변이 여러 번 일어나고 어제는 또 우박이 있었다. 하늘에서 재변을 내리는 것이 어찌 연유가 없겠는가? 정사가 잘못되고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은 그 잘못이 나에게 있는 것이니 내가 매우 두려워한다. 경들은 각각 나의 잘못한 일을 말하라. 또 외방 수령(守令)이나 서울에 있는 관리로서, 백성을 침탈하고 형벌을 남용하는 일이 없도록 거듭 금령을 밝히며, 민폐(民弊)에 관계되는 일은 뽑아서 아뢰라.” 이는 중종실록 4월 11일의 기록입니다. 이어 4월 12일에는 “내가 무슨 잘못한 것이 있어 이 재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