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68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되던 전차는 1899년 5월 20일 개통식을 하고 운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는 경성(지금의 서울) 일대의 전력 사업권을 받은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R. Bostwick)의 한성전기회사가 전기를 팔기 위해 전차를 놓은 것입니다. 고종황제의 홍릉 행차 시에 신하들이 여럿 동행해야 함으로 인한 재정 낭비와 불편함을 전차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허가를 받았고, 황실의 투자까지 받았습니다. ▲ 1930년대 한양 도성 안에 전차가 다니는 모습 전차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것은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 길이였었는데 서울전차의 개통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교토에 이은 두 번째였지요. 그때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개통하자 한양 도성 안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서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개통 이후 전차는 정차장을 설정하지 않고 승객이 세워 달라고 하면 아무 데서나 차를 세우거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사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갈잎 펴질 때에 뻐꾹새 자로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이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4월령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8째 절기 소만(小滿)으로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滿]는 뜻이 있습니다. 이때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먹고, 보리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띠어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이지요.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지며, 가을보리 먼저 베기, 여러 가지 밭작물 김매기가 줄을 잇는 바쁜 철입니다. ▲ 소만 무렵엔 "붕숭아 물들이기'를 한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입하와 소만 무렵에 행했던 풍속으로는 “봉숭아 물들이기”가 있지요. 봉숭아(봉선화)가 피면 꽃과 잎을 섞어 찧은 다음 백반과 소금을 넣어 이것을 손톱에 얹고 호박잎, 피마자잎 또는 헝겊으로 감아 붉은 물을 들입니다. 이 풍속은 붉은색[赤]이 악귀를 물리친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동지팥죽, 산수유열매, 혼인하는 신부가 찍는 연지곤지도 같은 풍속입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에 봉선화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역사상에 국가 민족을 위하여 끼친 공적을 말하자면 설총 선생의 이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문익점 선생의 목화재배, 김장 선생의 회례편람, 국방에는 양만춘,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이요, 정치 식견에는 황희, 정도전, 이이, 정약용, 박지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 3. 1)에 나오는 “선구자를 우러러 위대한 사상의 큰 어른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정치적 식견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황희 선생(1363년 ~ 1452)은 의정부(議政府)에 24년간 있으면서 일처리는 사리에 따르고 규모가 원대하여 대강(大綱)을 들면 세목(細目)은 저절로 열려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 명재상 황희와 황희가 말년에 갈매기와 벗한 파주 반구정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임금의 보살핌과 신임이 매우 중하여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궁중 안의 비밀스러운 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불러 자문할 정도였다고 하지요. 특히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나의 눈병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의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 등이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사람을 맞기 위해 일어서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이 부축하여야 하고, 마음속으로 조금이라도 놀라면 마음이 몹시 두근거리노라.(중간 줄임) 박연하위지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다하는데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하노라. ▲ 《현종실록》 6년(1665) 5월 15일 기록(왼쪽), 조선의 임금들은 온천을 즐겼다. 위는 이는 《세종실록》 31년(1449) 12월 3일 기록으로 세종임금이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목욕을 하러 간다는 내용입니다. 세종임금은 재위 중에 온천을 자주 갔지만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현종임금 만큼 온천을 즐겨 한 왕도 없습니다. 상이 눈병이 있은 이후로 서책의 글자 획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였는데,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난후로 크게 효험을 보아 문서의 작은 글자도 요연하게 볼 수 있었으며 수백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사람도 구별하였다. 다리에 난 부스럼은 거의 나아 아물었고 오른쪽 턱밑의 종기의 남은 것도 거의 사라졌다. 이는 《현종실록》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것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다.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임금 비서실 격이었던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취급하였던 행정 사무, 의례적인 것들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하나의 속기록이다. 이 책은 나라의 중대사에서부터 의례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정원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을 만큼 방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펴내기 위한 첫 번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는 기록물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초부터 기록되었으나, 인조대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고 현재 남은 것은 무려 3,243권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승정원일기 인터넷판 승정원일기를 쓴 사람들은 승정원에 소속된 주서(注書)로 예문관 소속의 사관(史官)과 함께 임금과 신하들이 만날 때 반드시 배석하여, 그들의 대화내용을 기록했는데 일종의 속기사였다. 주서는 과거합격자 중에서도 특별히 웅문속필(雄文速筆), 곧 사람이 하는 말을 재빨리 한문으로 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그래서 4~5월 여러 가지 공연들과 잔치들은 연기하거나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꼭 해야 할 공연이 있다면 바로 어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국악이야기콘서트 세종의 하루가 아닐까? 세종문화회관이 야심차게 기획한 이날 공연은 세종이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었는지를 보여주고, 통치자의 마음가짐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 되었다. 예만큼 악도 소중하다는 세종의 말을 들려주는 국악 이야기컨서트 방식의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이끈 서울시국악관현악단 황준연 예술감독은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였고, 아울러 예와 악을 제정하고 정비하였다. 예악(禮樂)은 문화국가 이상향에 이르는 덕치주의의 실천적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정대업, 보태평, 발상,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등 수많은 악곡들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악보에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 이 음악들은 세종대왕의 향악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세종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예(禮)보다 중한 것이 없으나 악(樂)의 쓸모도 또한 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예는 중히 여기면서도 악에는 소홀하여 이를 익히지 않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 국민 가운데 세종임금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지 않는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임금이 된 뒤 10년 동안 한 해도 가뭄이 들지 않은 때가 없었기에 매우 어렵게 임금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흉년이 연이어지자 흙을 파먹는 백성이 생겨날 정도였지요. 그래서 세종은 특히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생각했기에 평소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을 떠나 경회루 옆에 초가를 짓고 무려 두 해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초가에서 살고 근신하며 기우제를 지낸다 한들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농업서의 펴냄이었습니다. 세종은 1429년(세종 11) 정초(鄭招), 변효문(卞孝文) 등을 시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땅을 가는 법, 모판 만드는 법, 씨앗 고르기와 갈무리(보관)법, 옮겨 심는 방법, 비료 만드는 법,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 방법 따위가 적혔지요. 심지어는 씨앗을 눈 녹은 물에 여러 번 담갔다가 씨를 뿌리라고 했는데 이는 현대 과학으로도 인정된 방법이라고 합니다. ▲ 세종이 정초(鄭招), 변효문(卞孝文) 등을 시켜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표지(왼쪽)와 속 이 《농사직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병진년에 최해산이 도안무사가 되어 급히 아뢰기를, 정의현(旌義縣)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승천하였는데, 한 마리의 용이 도로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세종실록》 22년(1440년) 1월 30일 기록입니다. 이에 세종은 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또 그 용의 전체를 보았는가,(......) 그 머리나 꼬리를 보았는가, 다만 그 허리만을 보았는가? 용이 승천할 때에 구름 기운과 천둥과 번개가 있었는가? 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라며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 세종의 합리적인 질문에 과학적인 답을 하는 신하(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에 제주 안무사는 이렇게 아룁니다. 시골 노인에게 물으니, 지나간 병진년 8월에 다섯 용이 바다 속에서 솟아 올라와 네 용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구름 안개가 자우룩하여 그 머리는 보지 못하였고, 한 용은 해변에 떨어져 금물두(今勿頭)에서 농목악(弄木岳)까지 뭍으로 갔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일더니 역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옵고, 이것 외에는 전후에 용의 형체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내년 탄생 100주년-소처럼 우직했던 천재적인 뚝심의 기업가 어린 농꾼 樂은 신문 읽는 것한밤 2㎞ 걸어 구장집서 신문 구해 읽어 평생 농투성이로 살 수 없다 비상금 47전 들고 동네 선배와 첫 가출 길거리 거지의 끈질긴 생존법 간절해야 세상을 살 수 있다 큰 깨달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봉식은 약 4000평의 논밭을 소유한 중농이었는데 먹고 살기가 빠듯한 정도였다. 그런 가정에서 정주영은 서당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에게 다섯 살 되던 무렵부터 여덟 살까지 《동몽선습》,《소학》,《대학》,《맹자》,《십팔사략》 따위를 배웠다. 서당을 마친 정주영은 열 살 되던 해에 송전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공부를 하고 2등으로 졸업했는데, 이는 정주영의 최종학력이 된다. 어린 시절 정주영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때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동아일보를 읽는 것이었다. 농사일이 끝나면 날마다 밤에 2㎞ 떨어진 구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빌려, 연재되고 있던 소설 이광수의 흙을 호롱불 아래에서 읽었다고 한다.《소학》과 《십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이 때에 와서 세자가 호위병을 거느리고 성균관에 이르러, 유복(儒服, 유생들이 입는 옷)을 입고 대성전(大成殿)에 들어와서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네 분의 배향위(配享位)에 제사를 지내고,(......) 박사에게 속수례(束脩禮)를 행하고, 세자가 당(堂)에 올라 소학제사(小學題辭, 주자가 쓴 소학의 머리말)를 강(講)하였다. 돌아와 신궁에 나아가서 잔치에 배석하였는데, 임금이 학관(學官, 교육을 맡아 하던 벼슬아치)과 학생에게 음식을 주도록 명하였다. ▲ 세자시강원에 걸어두었던 춘방 편액으로 효명세자의 예필(국립고궁박물관) 《세종실록》 3년(1421) 12월 25일 기록입니다. 조선시대 왕세자는 '세자시강원' 관원에게 수업을 받았습니다. 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던 기관으로, 영의정이 책임을 맡았지요. 그때 성균관에서 열린 왕세자의 입학식은 나라의 큰 행사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제자가 가르침을 얻으려면 스승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야 했는데, 그 예법을 가리켜 '속수례'라 합니다. '속수(束脩)'는 '한 묶음의 포'라는 뜻으로서 비단, 포 등 가장 간소한 예물을 드렸던 것이지요. 위 기록처럼 왕세자라 할지라도 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