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청하현(淸河縣,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에 사는 백성은 오로지 소나무 껍질과 산나물 등으로 어렵게 연명하고 있고, 영천군(榮川郡, 현 영천시) 백성의 굶주리는 모습은 지극히 참혹합니다. 약한 사람들은 쓰러져 있고, 버려진 어린 아이들이 있어서 가는 곳마다 슬프게 울부짖습니다." 《명종실록》 3년(1548) 3월 25일 기록에는 위와 같이 굶주린 백성의 처참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경상좌도어사(慶尙左道御史) 송찬(宋贊)의 보고서인데 임금은 이를 영의정 윤인경에게 내리며 구황을 제대로 못한 수령에게 벌을 내리도록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시대 굶는 백성에게 나물은 귀한 구황식품이었습니다. 태종실록 9년에도 “나물캐는 사람이 산야(山野)에 널려 있다.”고 하는 내용이 있지요. ▲ 멧(산)나물(뱀도랒, 꽃머위, 원추리, 취나물, 곤드레, 부지깽이 따위), 속리산 자락 몰아이 골짜기에서 "상주 푸른누리 사람들이 뜯은 것 “나물”은 산이나 들에서 뜯은 식물 또는 푸성귀에 간을 하여 만든 반찬이며, 먹을 수 있는 야생식물의 재료를 두루 이르기도 합니다. 나물의 재료는 모든 푸성귀는 물론 버섯, 나무의 새순따위도
[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 어떤 이는 아쟁연주를 들으면 마음속으로 깊은 슬픔의 강물이 지나간다. 활대가8개의 줄을 문지르며 내는 그 소리는 들어본 사람은 다 가슴이 먹먹하다 할 정도로 한이 서려있다.라고 현악기 아쟁을 얘기합니다. 이 아쟁은 국악기 가운데 가장 낮은 음을 내는 악기로 거문고보다 큰 몸통에 긁은 줄을 얹고, 개나리 나무로 만든 활대에 송진을 바르고 줄을 문질러 소리를 냅니다. ▲ 남정네의 한을 소멸시키는 아쟁 / 산조아쟁 8현(위), 정악아쟁 10현 아쟁은 연주자의 앞쪽에 수평으로 뉘어 놓고 '활대'를 수직방향으로 써서 연주하거나, 가끔씩 손가락으로 가야금처럼 뜯기도 하면서 연주하지요. 아쟁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는데 정악아쟁은 7현10현이며, 산조아쟁은 정악아쟁보다 조금 작고 주로 8현입니다. 아쟁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퍼져있는 악기 '쟁(爭)'의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우리의 아쟁(牙箏)은 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겨서 연주하는 일본의 고토(箏, koto)나 중국의 쟁(箏, zheng)과 달리 유일하게 활대를 이용하여 줄과의 마찰로 소리를 내는 악기지요. 텔레비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근래 비상한 재변(겨울 천둥, 지진, 겨울이 봄같이 따뜻한 것, 흰 운기가 하늘에 뻗친 것 따위)이 자주 일어나는데, 재변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사(人事)에 잘못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다. 비록 공구수성(恐懼修省, 몹시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반성함)하여 천심(天心)을 돌리고자 하였으나 성의가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밤낮으로 걱정하며 두려워할 따름이다. 이는 《명종실록》 7년(1552) 1월 20일 치 기록입니다. 명종은 당시 지진 같은 재앙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몹시 두려워하며 반성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폭군으로 알고 있는 연산군도 즉위한 해 11월 25일 팔도 관찰사에게 백성을 사랑하도록 유시를 내립니다.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과 부인 신씨 무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안정되는 것인데, (...) 지금 내가 새로 대업을 계승하며 매양 백성의 처지가 어렵고 힘듦을 생각하니, 언제나 나 때문인가 하는 마음으로 안타깝다. 이는 허다한 군읍의 수령을 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얻지 못한 것이니, 백성에게 노역을 시킬 때에 어찌 징발이 고르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뒷줄임) ▲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찍은 사진(왼쪽), 선언문 위는 윤봉길 의사 (尹奉吉, 1908.6.21~1932.12.19)가 두 아들에게 쓴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라는 시 일부입니다. 윤 의사는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두고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1932년 4월 29일, 82년 전 오늘은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한 것이지요.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합니다. 이어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다가 1926년에는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러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우리는 일제강점기 온 재산을 털어서 나라밖으로 팔려나가는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 선생을 압니다. 선생은 문화재를 지키는 것으로 또 다른 독립운동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전형필이라면 광복 뒤엔 윤장섭 선생이 있습니다. 선생은 개성 출신으로, 6·25 전쟁 이후 쏟아져 나온 많은 문화재가 나라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우리의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뒤엔 그때 미술사학계의 3대 대가인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곧 개성 선배들이 뒤를 뒷받침했지요. 1974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선생에게 편지 한 장과 도자기 몇 점이 배달됐습니다. “품평 앙망하나이다. ①백자상감모란문병 200만원 ②분청사기철화엽문병 250만원 ③자라병(높은 값을 부르는데 혹 모조품은 아닌지요).” 최순우 선생은 그 편지 위에 바로 답장을 써 보냅니다. “②번은 값을 좀 조절하더라도 놓치지 마십시오. 나머지는 별것 아닙니다.” 귀찮다 생각하지 않고 언제 꼼꼼히 따져 조언을 준 덕분에 실수 없이 윤장섭 선생은 문화재를 사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 호림박물관을 세운 윤장섭 선생과 서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배달겨레, 그들은 수천년 동안을 같은음식을 먹고 살았다. 물론 그동안 음식들고 부침이 있어 없어진 새로운 음식들이 태어나고 또 없어지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생긴 먹거리에 대한 상식들. 하지만 그런 상식이란 것도 엉터리가 많다. 무엇이 우리에게 바른 먹거리 상식인지 살펴볼 일이다. 밀가루는 우리의 주식이 아니었다 “밀가루는 예부터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빈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구황식품(救荒食品)이다. 게다가 밀가루는 서늘한 음식이기에 흡수가 잘 안 되고, 장에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장을 차게 해 좋지 않다. 또 밀가루가 기름과 만나면 장에 지방을 많이 끼게 하기 때문에 기름과 만난 밀가루는 더욱 피해야 한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그것은 우리 몸엔 쌀이 잘 맞는다는 말이며, 의학적으로 보면 성질이 따뜻하고, 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다.” ▲ 수제비, 밀가루 음식 한 한의원 원장의 말이다. 밀가루 음식을 가끔 먹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주식으로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이다. 더구나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땅과 기후에 토착화된 밀이 아닌 서양밀로 만든 밀가루는 우리 몸에 더 안 맞을 것이다. 더더구
[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 어제 지하청 3호선 경복궁역 미술관에서 산사의 풍경소리라는 주제로 제19회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개막식이 있었다. ▲ 안장헌 산사점청(山寺點晴) 한국불교사진협회와 부처님 오신날 봉축위원회 주최로 열린 이날 전시회 개막식에는한국불교사진협회 박봉수 회장을 비롯하여 사진을 출품한 회원과 관람객 등 100여명이 참석하여 1년간 풍경사진을 찍기 위해 전국의 절을 찾아 발품을 판 회원들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개막식에서 협회 박봉수 회장은 고즈넉한 산사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스님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친구이자 스승인 풍경. 우리는삶에 지친 영혼에 위안을 주는 풍경에 매료 되었다.라는 개막인사를 했다. 개막인사에 이어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풍경(風磬)은 단순한 경세의 의미를 넘어 수행자나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뿐 아니라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축사를 한국불교사진협회 안장헌고문이 대신 읽었다. ▲ 개막인사를 하는 한국불교사진협회 박봉수 회장(왼쪽)과 대한불교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의 축사를 대신 읽는 안장헌 고문 ▲ 제8회 청소년불교사진 공모전 시상식,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나는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이 바람을 만나서 표류, 침몰하였다는 것을 듣고, 그 배에 탔던 천여 명의 사람이 다 빠져 죽었을까 하여 아침저녁으로 걱정했었다.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네가 빨리 소식을 올려 내 걱정을 풀리게 하였구나. 내 이를 아름답게 여겨 특히 옷 한 벌을 내리니, 너는 이를 받을지어다.” 이는 《세종실록》 1443년(세종 25년) 6월 8일치 기록입니다. 여기서 조운선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과 생활용품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던 배를 말합니다. 특히 고려시대 전남지방의 수령현(遂寧縣, 현 장흥), 죽산현(竹山縣, 현 해남), 회진현(會津縣, 현 나주) 등지에서 사용하였던 조운선 ‘마도 1호선(1208년 제작)’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충남 태안 마도 앞바다에 침몰한 것을 2010년 수중 발굴한바 있으며 10월 3일까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이 배를 복원할 예정입니다. 고려시대에 앞서 신라시대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이미 뛰어난 배를 만들어 아시아의 해상활동을 장악한 역사가 있습니다만 해상에서의 선박 침몰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 큰비가 와 백성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지금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공연장도 많고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듣기도 하고, 더더구나 요즘은 컴퓨터로 즐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전엔 음악 듣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 판소리가 유행하는데 이때는 명창을 불러다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통해서 축음기라는 것이 들어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축음기(蓄音機)는 말 그대로 “소리를 쌓아두는 기계”인데 이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이 축음기를 “귀신소리 나는 기계”라고 했다 하지요. 명창 박춘재는 우리나라에 축음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축음기에 소리를 녹음해 즉석에서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미국의 빅터레코드사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지요. 그 뒤 1930년대 이후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자 덩달아 축음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축음기를 사려면 회사원이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가능했기에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하였지요. 그래서 축음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유한 사람 외에는 축음기가 없던 시절 판소리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산 속 습지부근에 무리를 이뤄 사는 참꽃마리를 아시나요? 참꽃마리는 쌍떡잎식물 치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털개지치, 북부지채, 왕뿌리꽃마리라고도 부르는데 소박하고 앙증맞은 우리 들꽃입니다. 참꽃마리는 푸른 빛, 또는 분홍빛이 묻어나는 흰꽃을 핍니다. 들에 사는 꽃마리는 꽃이 작고 두해살이인데 견주어 숲 속에 사는 참꽃마리는 꽃이 꽃마리보다 크고 여러해살이 꽃입니다. 꽃마리는 도르르 말린 줄기가 펴지면서 한 송이씩 꽃을 피워 꽃마리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참꽃마리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참꽃마리입니다. ▲ 그늘진 계곡을 아름답게 꾸미는 참꽃마리 ⓒ "희수의 들꽃편지" 블로그 지치과의 꽃들이 그러듯이 키는 10~15cm 정도이며, 꽃은 0.7~1cm로 작고 귀여운 꽃이어서 키를 낮춰야 볼 수 있는 꽃입니다. 그렇게 그늘진 계곡을 아름답게 꾸미는 참꽃마리 무리를 만나면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 사는 모습이 정겨워집니다. 그래서 "참꽃마리"는 혼자는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여럿이라 더욱 아름다운 꽃이지요. 참꽃마리는 그저 예쁘다고 보는 꽃만이 아니라 다음 민요에서 나오듯이 봄철에는 나물로 한몫 하기도 합니다. ‘한푼두푼 돈나물 / 쑥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