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햇볕이 따사한 요즘 들녘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쑥이며 쑥은 단군신화에도 나올 만큼 우리 겨레와 오래도록 함께 해온 식물입니다. 파릇파릇 돋아난 상큼한 쑥을 캐서 쑥버무리나 쑥개떡을 해먹어도 좋고 입맛이 없을 때 쑥국을 해먹어도 좋은 음식입니다. 1933년 4월 2일치 동아일보에는 따뜻한 볕 아래 쑥 캐는 아이들이란 흑백 사진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봄이 되면 흔히 보던 모습입니다. ▲ 따뜻한 볕 아래 쑥을 캐는 아이들(왼쪽, 동아일보 1933.4.2), 쑥 개떡 쑥으로 만든 먹거리로는 쑥밥을 지어 양념장에 비벼먹는 것이 일품인데 어린 쑥을 깨끗이 다듬어 물기를 뺀 뒤 밥을 짓다가 뜸이 들기 전에 쑥을 넣어 뜸을 들이면 파릇한 색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쑥단자나 쑥조청을 해먹어도 좋고 어린잎을 그늘에 잘 말려 쑥차를 만들어 마시는 것도 색다른 맛입니다. 쑥에는 피를 맑게 하여 혈액순환을 돕는 기능이 있어 고혈압과 동맥경화 예방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백혈구 수를 늘려 면역력을 높이는 살균효과가 있으며 쑥의 독특한 향기인 치네올이라는 성분은 소화에도 좋습니다. 또 쑥에는 미네랄과 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원상 최항, 김질이 아뢰기를, ‘근래 날씨가 가뭄이 들어 임금께서 몸소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신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낮에 물을 만 밥을 올리도록 하시니, 예전 임금님께서도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세종임금께는 비록 풍년이 들었더라도 수반을 올렸는데, 지금 수반을 쓴들 어떻겠는가?’ 하였다. 김질이 다시 아뢰기를, ‘보통 사람들도 지라와 위장이 찬 것을 싫어하기에 수반이 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하는데, 하물며 임금님께서야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하니 다시 임금이, ‘경의 말과 같다면 매양 마른 밥만 먹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위 내용은 《성종실록》 6권 1년 6월 1일 기록입니다. 또 《인조실록》 22년(1644) 5월 5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 재앙이 닥치면 임금은 초가로 거처를 옯기고 식음을 끊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인심이 이미 떠났고 나라의 형세가 이미 위태해져서, 헤아릴 수 없는 변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났고, 위험한 종기가 이미 터져서 고름은 짜내 버렸지만 원기는 저절로 손상되었으며, 천재와 시변이 날로 더욱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엄마 어머이 어머니 대답이 없으시군요. 시인은 그렇게 읊조린다. 엄마를 애타게 불러보지만 이미 엄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대답이 없으실 밖에. 충북 충주문화원장 전찬덕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집 《어머니와 다릿목돼지》를 도서출판 석기시대를 통해 내놓았다. 시집 전체엔 엄마의 젖냄새를 갈구하는 그의 간절함이 묻고 또 묻어난다. 우리 모두에겐 어머니의 기억이 있다. 구수한 누룽지를 긁어 살강에 놓으시곤 궁금할 때 먹도록 해주셨던 엄니, 눈보라를 맞으며 추운 겨울 학교에 다녀왔을 때 꼬옥 안아주시던 엄니, 갑자기 체해 배가 많이 아팠을 때 그 따뜻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주시던 엄니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하지만 그 엄니는 우리의 가슴 속에는 남아있다. 그런 어머니를 전찬덕 시인은 시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회상한다. 부치기 아홉 소당을 다 먹도록 그만 먹어라 한 번 안하신 당신은 잘 먹는 내 모습이 그렇게도 대견하셨다지요. 둥근 후라리팬을 보아도 구멍난 목장갑을 끼어도 당신의 채취가 묻어납니다. 후라이팬을 보아도 구멍난 목장갑을 끼어도 어머니가 그리워 그는 목을 멘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 밀가루는 우리의 주식이 아니었다 “밀가루는 예부터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빈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구황식품(救荒食品)이다. 게다가 밀가루는 서늘한 음식이기에 흡수가 잘 안 되고, 장에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장을 차게 해 좋지 않다. 또 밀가루가 기름과 만나면 장에 지방을 많이 끼게 하기 때문에 기름과 만난 밀가루는 더욱 피해야 한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그것은 우리 몸엔 쌀이 잘 맞는다는 말이며, 의학적으로 보면 성질이 따뜻하고, 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다.” 한 한의원 원장의 말이다. 밀가루 음식을 가끔 먹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주식으로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이다. 더구나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땅과 기후에 토착화된 밀이 아닌 서양밀로 만든 밀가루는 우리 몸에 더 안 맞을 것이다. 더더구나 서양밀가루가 재배할 때의 농약뿐만이 아니라 배에 실을 때 살균제와 살충제를 섞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큰 문제이다. 몇 년이 지나도 벌레가 살 수 없는 밀가루가 과연 사람 몸에도 괜찮을까? ▲ 국수와 수제비, 밀가루는 서늘한 성질의 구황식품이었다. 또 다른 밀가루에 대한 상식을 더듬어 보자. 판소리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종실(宗室) 원흥수(原興守) 이후(李煦)가 별감(別監) 김세명(金世鳴)을 만났는데, 김세명이 후가 답배(答拜)를 하지 않는다며 욕을 하므로, 이후가 화를 내며 그의 입에다 오물을 집어넣고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뒤 김세명이 패거리 20여 명을 데리고 이후의 집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 후를 끌어내다 묶어 놓고 마구 때렸습니다. 후의 형 이경(李炅)이 격고(擊鼓, 임금이 거둥할 때에, 억울한 일을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별감 등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몰아서 내쫓고 뺨을 때려 피가 났으며, 사모(紗帽)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습니다.” ▲ 신윤복의 <야금모행>, 왼쪽 붉은 옷을 입은 이가 조선시대 무뢰배 별감이다. 위 내용은 《숙종실록》 38년(1712) 10월 20일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김세명은 액정서별감(掖庭署別監, 궁궐 안에서 왕실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궐내 각문의 문단속, 궐내 각종 행사준비, 시설물관리, 청소·정돈 따위의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이었고, 이후는 임금의 친족입니다. 액정서별감이 감히 종친을 두드려 팬 사건이지요. 물론 김세명은 처벌 받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버버리 찰떡”은 일제강점기부터 경북 안동지역 사람들의 주요 간식이자 한 끼 대용식으로 사랑받아왔습니다. 경주에는 황남빵, 강원도에는 안흥찐빵이 있다면 안동에는 “버버리 찰떡”이 있는 것이지요. 이 떡은 일제강점기 김노미 할머니가 지금은 사라진 안동시 안흥동 경북선 철길 밑에서 빚어 판 것을 시작으로 안동시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 불황으로 가게 문을 닫은 뒤 한 때 명맥이 끊어졌었지요. 그러다 종종 사먹던 찰떡의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지역의 대표적 먹거리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김동순(76) 할머니를 찾아가 "안동의 자랑인 버버리 찰떡이 후대에 전수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권유하여 그때의 사라진 '버버리 찰떡' 맛을 되살렸다고 하지요. “버버리”는 벙어리의 안동 사투리입니다. 찰떡이 워낙 크고 맛이 좋아 한 입 베어 물면 말을 잘 할 수 없어 마치 벙어리처럼 된다고 해서 '버버리 찰떡'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지요. 이 떡은 떡 고물을 떡 속에 넣지 않고 직사각형 모습의 찰떡 양쪽에 콩이나 팥고물을 듬뿍 묻힌 특이한 모양으로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버버리떡은 재료의 절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 전기만 해도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가족제도를 이어받아 아들과 딸이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제였으며, 제사도 아들은 물론 딸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16세기 초 이래로 균분상속제가 무너지고 장자상속으로 바뀌어가면서 부계중심의 가족제도로 굳어집니다. 그와 함께 입양 사례가 빠르게 늘어나는데 이는 장자상속이 보편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장자상속과 그에 따른 입양사례를 가장 실감나게 엿볼 수 있는 것이 보물 제482-5호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고산양자 예조입안(禮曹立案)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선조 35년(1602) 6월 초 이틀에 윤유심(尹唯深)의 둘째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유기(唯幾)에게 양자로 들일 것을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지요. 이를 보면 양쪽 집안의 동의서, 동성과 이성(異姓)권의 보증서를 확인하고 《경국대전》 입후(立後)의 규정에 따라 나라에 이를 허가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냈는데, 이를 좌랑, 정랑, 참의, 참판, 판서가 수결(지금의 서명)하여 허락한 것입니다. ▲ 고산 윤선도의 입양을 허락한 예조의 고산양자 예조입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일본 중위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 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 양민 학살도 모자라 불을 싸지른 일본군의 만행으로 폐허가 된 마을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 제암리 학살 현장에서 유해가 발굴되자 남편일지도 모를 한 유해의 정강이 뼈를 쓰다듬으며 오열하는 전동례 할머니(1982년 9월 25일) 위는 전동례 할머니의 구술기록인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에 나오는 증언입니다. 전동례 할머니는 21살에 남편 안진순을 제암리 학살로 잃고 말 못할 세월을 살아내면서 구술로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을 지으며 통곡의 한을 새겼습니다. 이날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군의 만행으로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공신전(功臣田)은 고려·조선시대에 나라 또는 왕실에 특별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땅을 말합니다. 특히 주로 나라를 연다든지 새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공신에게 준 것이지요.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 때 책봉된 개국공신(開國功臣)회군공신(回軍功臣)원종공신(原從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을 비롯하여 태종·단종·세조·중종·인조·영조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19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고 공신전을 나눠주었습니다. 공신전은 개인 재산이 되어 상속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세금도 면제되었습니다. ▲ 청백리 이해((李澥), 공신전을 백성에게 돌려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 공신전을 받은 사람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때의 이해(李澥, 모름 ~ 1670년(현종 11)도 있지요. 그는 반정의 공으로 개성부 유수 벼슬을 받은 것은 물론 여의도 면적의 63%나 되는 땅 165만평(150)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이 공신전이 억울한 백성의 땅이 많이 들어있다면서 방을 붙여 원 주인인 억울한 백성이 오면 모두 돌려주게 했지요. 반정 때 반대파로 죄를 받은 사람은 부정축재했다고 하여 재산을 모두 빼앗겼는데 반대파들이 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대한민국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이 삼일만세운동과 그를 이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해방조국을 맞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제대로 잇고 있는지 걱정이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현주소 瑞金2路)에 모인 각 지방 대표 29명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했으며,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한 뒤 국무원을 꾸렸다.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임시라는 혹이 붙긴 했지만 “대한민국”이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95년 전 조선을 강제침략한 일제에 대항하여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린 매우 뜻 깊은 날이다. ▲ 경북 안동 경상북도독립기념관에서 있은 기념식 장면, 이항증 광복회 경북지부장이 임시정부 약사보고를 하고 있다. ⓒ강정식 ▲ 대한민국임시정부 약사보고를 하는 이항증 광복회 경상북도지부장, 축사를 하는 경상북도 박의식 보건복지국장, 축시를 낭송하는 이윤옥 시인, 특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