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은 물론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가 무척이나 즐겼던 전통차는 삼국시대에 인도나 중국에서 들어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처음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지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처음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27대 선덕왕(632~647)이며, 처음 차 씨앗이 뿌려진 것은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에 대렴이 임금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가져온 씨앗을 지리산 부근에 심었다. 이것이 그동안 정설처럼 알려진 차 전래의 시작이다. 하지만, 최근엔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은 사대주의 시각이며, 실제는 그 이전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우선 일부 내용이 일연의 ≪삼국유사≫ 전한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89)이 금관가야의 왕비로 시집오면서 차씨와 차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또 같은 책에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 제사에 차(茶)를 제수품목에 넣은 것으로 나온다. 이해는 서기 661년으로 흥덕왕 3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게 한 육우(733~804)가 태어난 해보다 무려 72년이 앞선 것이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오늘은 경칩(警蟄)과 청명(淸明) 사이에 드는 24절기 가운데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천문학에서는 해가 남에서 북으로 천구(天球)의 적도와 황도(黃道)가 만나는 점(춘분점)을 지나가는 3월 21일 무렵을 말하지요. 이때는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한해 가운데 농사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로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농부들의 손길도 바빠집니다.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하늘바라기(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기 위해 물꼬를 손질하지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은 이 음력 2월 곧 춘분 앞뒤를 이르는 때로 이때에 비로소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됩니다. ▲ 춘분(春分),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날 그러나 좋은 일이 많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어서 이때를 전후해 많은 바람이 불지요. 그래서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속담도 나왔고, '꽃샘추위', '꽃샘바람'이라는 말 역시 꽃이 필 무렵인 이때의 추위가 겨울 추위처럼 매섭고 차다는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닷가 마을에서는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고, 나가더라도 멀리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 신라는 가장 화려한 황금문화를 꽃피운 나라였습니다. 8세기에 나온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면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은(金銀)의 나라”라고 기록하였으며 또한 966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는 "신라를 는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했습니다. 신라에서 금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 신라는 김씨(金氏)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고, 마립간이라는 왕호(王號)를 사용하였으며,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간을 신라의 황금문화 전성기로 보는데, 이 기간 동안 조성된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매우 정형화된 꾸미개(장신구)가 출토됩니다. ▲ 신라의 임금이나 왕족이 썼던 금귀걸이(위)와 금은 그릇 무덤에 묻혔던 사람들은 대체로 금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금동신발 등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황금 제품들은 임금이나 왕족, 귀족들이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주로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천마총의 높고 커다란 봉분 아래 첩첩이 쌓인 돌무지로 덮인 나무 덧널 속 이 널 안에 잠든 이는 과연 어느 임금일까요? 비록 몸은 남아 있지 않으나 임금의 넋은 서려 있을 테지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8일 공개한 ‘천마(天馬), 하늘을 날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끄는 커다란 나무널(목관)이 전시되어 있고 그 위에는 이름 모를 임금에 대한 추모시가 걸려있다. ▲ 복제한 천마총 출토 목관, 앞에는 묻힌 이에게 바치는 국화꽃바구니를 놓았다. ▲ 금제 허리띠 따위가 들어 있던 목관 발굴 당시를 재현 어느 임금이었을까? 나무널 안에는 임금이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왕관을 비롯한 허리띠 꾸미개며 팔찌 같은 황금장식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육신은 갔지만 변치 않는 황금의 위용은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여전히 찬란한 금빛을 발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개막 이틀째지만 전시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천마총 유물들을 보려고 찾아와 열심히 유리 전시관 안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경주 대릉원에 자리한 천마총은 1973년 발굴 당시 신라 고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만 추측하고 있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바람꽃을 아시나요? 바람꽃은 꿩바람꽃, 변산바람꽃,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세바람꽃, 만주바람꽃 같이 그 종류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은 바람꽃인데 다른 바람꽃과는 모양이 다른 회리바람꽃도 있습니다. 회리바람꽃이란 회오리바람의 강원도 사투리로 꽃 핀 모양이 나선모양으로 도는 회오리바람 같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 바람꽃이면서 다른 바람꽃과는 모양이 다른 회리바람꽃 바람꽃은 대부분 꽃잎이 퇴화되고 꽃받침이 꽃잎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회리바람꽃은 그 꽃받침마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마치 배드민턴의 셔틀콕이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함께 태백산에서 자라 모양이 닮은 태백바람꽃도 있지만 태백바람꽃은 회리바람꽃과 견주어 꽃받침조각이 더 넓고 길며, 꽃받침이 뒤로 덜 젖혀집니다. 태백산 깊은 숲에서 만날 수 있는 회리바람꽃은 언뜻 보면 볼품없다고 “이것도 꽃이냐?” 하는 이도 있겠지만 작은 꽃다발을 질끈 묶은 듯한 모습은 볼수록 매력이 있지요. 지극히 수수해서 오히려 멋진 회리바람꽃! 어쩌면 이래서 진정한 우리의 들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도 그와 같이 화려하지 않지만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의 토기들이 있습니다. 신라가야지역에서 많이 발굴되었으며, 백제지역에서도 일부 나타나는 이형토기(異形土器)가 그것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을 조각해놓은 순수한 토우(흙인형), 토우를 붙여 꾸민 토기, 동물이나 물체를 표현한 형상토기(形象土器), 일반용기를 약간 변형시킨 기형용기(奇形容器) 따위로 나뉩니다. ▲ 이형토기(異形土器)들 / 바퀴장식 뿔잔, 사람모양 토기, 동물모양 토기(왼쪽부터) 기형용기에는 접시나 병단지 따위를 변형시킨 것이 많은데 굽다리접시 가운데는 원통형의 작은 잔을 다시 올린 이중배(二中杯)와 원통형 관을 끼워 신선로같이 만든 그릇 따위가 있지요. 또 납작병에 깔대기 모양의 아가리가 붙은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형태로 바퀴가 붙은 뿔잔, 주둥이가 위로 나지 않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는 인형모양 토기, 동물모양으로 아가리에 구멍이 뚫린 이동용 소변기로 보이는 동물모양 토기(호자, 虎子)같은 것도 보입니다. 이렇게 기이한 형태를 한 토기들의 쓰임새는 확실히 알기 어렵지만 특별한 물건을 담거나 주술적이고 의례적인 제사용기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 나아가 죽은 자의 영혼을 담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박을 쪼개지 않고 꼭지 부분을 따내거나 꼭지 옆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내고 속을 파낸 다음 거기에 씨앗을 갈무리해 두는 그릇이 뒤웅박입니다. 뒤웅박의 사투리로는 두베,됨박,두벵주름박,뒝박,두뱅이주룸박,두룸박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경북 상주지방에서는 오짓물로 구운 것을 쓰며, 박이 나지 않는 데서는 짚으로 호리병처럼 엮어서 쓰기도 하지요. 또 함경도 지방에서는 뒤웅박에 구멍을 뚫고 속이 빈 작대기를 꿰어 씨를 뿌릴 때 썼습니다. 뒤웅박의 모양은 보통 바가지처럼 둥글지만, 호리병처럼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박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 씨앗을 갈무리해두는 뒤웅박 뒤웅박은 씨앗을 갈무리하는 데만 쓰지 않고, 도시락처럼 쓰기도 하는데 습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여름철에 밥을 담아두면 잘 쉬지 않습니다. 그밖에 달걀 따위도 넣어두며, 가을에 메뚜기를 잡아 담는 통으로도 썼습니다. 흔히 처마 밑이나 보꾹(지붕의 안쪽) 밑 또는 방문 밖에 매달아둡니다. 뒤웅박은 보통 씨앗 510리터를 담을 수 있지요. 뒤웅박이 들어간 속담을 보면 뒤웅박 신고 얼음판에 선 것 같다가 있는데 이는 몹시 위태로워서 불안하고 조심스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의 진귀한 음식들, 궁중 수라상 1) 초조반 탕약이 없는 새벽에는 죽상을 차린다. 죽은 계절에 따라 여러 가지 부재료를 넣고 끓인다. 왼죽(粒粥 입죽:불린 쌀을 통으로 쑤는 죽)흰죽전복죽원미죽(쌀을 갈아 싸라기로만 쑨 죽에 설탕ㆍ약소주를 타고 얼음으로 차게 식힌 죽)장국죽(쇠고기로 끓인 맑은 장국에 쌀을 넣고 끓인 죽)버섯죽잣죽타락죽(우유죽)깨죽 따위가 있다. 죽에 따르는 반찬은 젓국조치와 동치미나박김치마른찬간장소금꿀 등으로 간단하게 차린다. 죽은 병자음식이 아니라 몸을 보하는 음식이다. 2) 수라상 임금과 중전이 평소에 아침과 저녁으로 받는 밥상의 이름. 아침수라는 10시 무렵, 저녁수라는 저녁 67시에 올린다. 수라상에 밥은 흰쌀밥과 팥밥, 두 가지를 올리는데 팥밥은 붉은팥을 삶은 물을 밥물로 하여 지은 것으로 홍반이라 한다. 밥은 왕과 왕비용으로 곱돌솥에 안쳐서 화로에 참숯을 피워 짓는다. 수라상 원반에는 흰밥과 미역국을 짝으로 올리되, 팥밥과 곰탕은 책상반(冊床盤, 보조수라상)에 놓았다가 원하면 바꾸어 올린다. ▲ 수라상에는 흰쌀밥과 더불어 꼭 잡곡밥을 올려놓았다.(뉴스툰) 찌개는 맑은조치[조치:바특하게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듣자 하니 젖을 먹일 여종 학덕이가 태어난 지 서너 달 된 자기 아이를 버려두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더구나. 이는 학덕의 아이를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근사록(近思錄)≫에서는 이러한 일을 두고 말하기를 ‘남의 자식 죽여서 자기 자식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고 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이와 같으니, 어쩌면 좋으냐. 서울 집에도 젖을 먹일 만한 여종이 있을 것이니…….” ▲ ≪근사록(近思錄)≫, 36.5×24.0cm, 국립대구박물관, "남의 자식 죽여서 자기 자식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위 내용은 퇴계가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 일부입니다. 퇴계가 끔찍이 사랑했던 손자 이안도의 아들 곧 증손자는 어미의 젖을 먹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대신 젖을 먹여 키워줄 여종 학덕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퇴계는 역시 해산 한지 얼마 안 되는 여종 학덕에게 자신의 자식을 내버려두고 가게 하는 것은 여종의 자식을 죽이는 것이라며 반대합니다. 이처럼 조선 최고의 지성 퇴계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종들도 존중했지요. 퇴계에 관한 일화로 대장장이 배순이야기도 있습니다. 소수서원 근처 대장장이 배순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이 대목에 누구나 익숙하다. 배뱅이와 이은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 배뱅이굿의 주인공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예능보유자 이은관 명인이 12일 97살로 세상을 떴다. 고인은 다음 달 25일에도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배뱅이굿을 공연할 계획일 만큼 그동안 정정한 모습으로 배뱅이 끈을 놓지 않았었다. 고인은 배뱅이굿을 시작한 뒤 80돌을 맞은 지난해에 무대에 올라 얼굴도 모르는 배뱅이가 평생 나를 먹여 살렸으니 고맙기만 하다는 말을 했었다. ▲ 배뱅이굿을 부르는 생전의 이은관 명인 배뱅이굿은 상사병을 앓다 숨진 배뱅이 이야기를 장구 반주에 맞춰 서도소리로 풀어내는 1인 창극이다. 고인은 1957년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한 뒤 일약 스타가 됐다. 당시 영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6만 장이나 팔렸다.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라는 대목은 1960년대 인기 코미디언 남보원 씨가 흉내 내 더욱 유명해졌다.. 고인은 장구를 자유자재로 돌리면서 기차소리, 바람소리를 낼만큼 장구와 소리의 명인이었다. 1950~60년대 청